오원철 전 청와대 제2경제수석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적지 않다. 1974년 중화학공업기획단장을 맡아 지금 우리 경제를 이끌고 있는 주력산업들의 비전을 그렸던 인물이다. 한국 최고의 엔지니어들이 모인 공학한림원에서 그에게 2011년 공학대상을 수여했다. 오 수석의 공적을 인정한 것이지만 정작 그는 상금 1억원을 지난 경제성장 과정에서 헌신했던 기능공들을 기억할 수 있는 일에 써달라고 내놨다. 자신보다 기능공들의 기여가 훨씬 컸다고 느꼈던 모양이다.

요즘 관료들을 만나면 국가적 사명감보다 개인이나 부처 이익을 우선시한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다. 한 전직관료는 국장,실장,차관으로 올라가면서 국가보다 부처 이익을 따지는 비중이 80%,90%,100%로 높아지더라고 고백한다. 행정학자들은 관료제의 폐혜가 위험수위를 넘었고,특히 관료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과 그렇지 않은 일을 혼동하기 시작할 때 그 폐혜는 극에 달한다고 경고한다.

곽승준 청와대 미래기획위원장이 "대기업이 관료제의 함정에 빠졌다"고 비판했다. 기업이 거대해지면서 유연하지도 도전적이지도 않은 조직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여느 경영학자들의 얘기와 별반 다를 것도 없다. 문제는 그가 대기업을 창의적 조직으로 바꾸기 위한 방안을 준비 중이라고 한 대목이다. 곽 위원장은 기업지배구조에 변화를 가져올 정책을 발표하겠다고 했다.

미안하지만 이것은 곽 위원장이 나설 일이 아니다. 대기업이 관료제의 함정에 빠지면 누구보다 걱정해야 할 사람은 그 기업의 최고경영자(CEO)일 것이다. 시장은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는 기업을 절대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업의 흥망성쇠는 시장의 힘이 그만큼 무섭다는 것을 웅변하고 있다. 창의적 기업은 공산주의,사회주의식 설계주의가 아닌, 누구도 예외를 허용하지 않는 냉정한 시장의 결과물이다.

미래기획위원장이 국가 미래를 생각한다면 기업 지배구조가 아니라 오히려 정부 지배구조를 걱정해야 한다. 기업 지배구조가 문제가 되면 그 기업이 망하는 것으로 끝나지만 정부 지배구조가 문제가 되면 국가 전체가 위기에 직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정부는 이에 대한 위기의식은 전혀 없다.

미래기획위원회가 지난달 주최한 '글로벌 코리아 2011'포럼에서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은 "한국경제에는 알파 개념이 확장된 알파라이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현대는 칸막이가 없어지고 융합을 통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시대"라며 "알파라이징 개념을 산업에 적용해 신성장동력을 창출하고 미래 전문인력 양성에 초점을 둬야 한다"는 것이 윤 장관의 주장이다. 말은 맞지만 융합시대를 가로막고 있는 가장 큰 걸림돌이 바로 정부 지배구조라는 사실을 윤 장관은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명박 대통령이 국가과학기술위원회를 대통령 직속 행정위원회로 개편하고 역할과 기능을 강화하겠다고 했을 때 과학계,산업계는 일제히 박수를 보냈다. 더이상 관료나 부처 이익에 휘둘리지 않도록 칸막이를 철폐하고,융합시대에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는 새로운 국가연구개발 행정체제의 탄생을 기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재정부, 지경부 등 소위 힘센 부처들의 저항에 밀려 오는 28일 출범하는 국과위는 앙상한 뼈만 남은, 말 그대로 형해화되고 말았다. 이것이 정부 지배구조의 현실이다. 정부는 기업들을 훈계하려 들지만 기업들은 정부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걱정하고 있다.

안현실 논설위원·경영과학博 ah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