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세때 渡日…재일교포 버팀목
"죽음 알리지 말라" 끝까지 신한 걱정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는가 싶더니 이내 울먹거렸다. 23일 열린 신한금융지주 주주총회 및 이사회에서 차기 그룹 회장으로 선출된 한동우 회장.300여명의 주주들 앞에서 정식으로 취임 인사를 하자마자 신한은행 창업 주역인 이 명예회장의 별세 소식을 전해야 했다.
고(故) 이 명예회장은 신한금융그룹과 재일교포 사회가 자립하고 성장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일생을 바친 인물이다. 그래서 신한 임직원들과 재일 한국인들에게는 물질적,정신적 버팀목이었다. 신한은행 오사카 지점장을 지내며 그를 가까이서 보좌한 신한은행 고위관계자는 "이 명예회장은 재일 한국인들 사이에서 100년에 한 번 나올 만한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았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이 명예회장을 돋보이게 한 건 희생정신이었다. 가족보다도 조국과 신한은행을 먼저 생각했다. 은행을 설립하고 한창 한국에서 활동할 때는 아내의 임종도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 당시 비행기편이 여의치 않아 부산에서 배를 타고 시모노세키로,또다시 신칸센을 타고 오사카로 이동해 아내의 장례식에 참석해야 했다는 후문이다.
1988년 서울올림픽 당시엔 일본에서 100억엔을 모아 한국에 기부했으며 외환위기가 닥치자 '국내송금보내기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그는 90세가 되던 2007년까지 매년 신한은행 업적평가대회와 신한금융 주주총회에 빠짐없이 참석하기도 했다.
이 명예회장은 일제 식민지 시대인 1917년 경상북도 경산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궁핍한 농촌생활을 벗어나고자 상경(上京)해 일본인 가게 점원으로 생활했다. 그는 1932년 열다섯 살의 나이로 혈혈단신 현해탄을 건너 오사카로 갔다. 그리고 1945년 광복 후 오사카 쓰루하시역 앞 무허가 시장에서 자전거 타이어 장사를 시작했다. 일본 경찰은 재일 한국인이 상인의 40%를 차지했던 이 시장을 1946년 폐쇄한다. 그러자 이 명예회장은 재일 한국인을 대표해 각계에 시장 재개(再開)를 호소했다. 이에 1947년 시장이 다시 문을 열었고 그는 30세의 나이로 상점가동맹(商店街同盟) 초대회장에 뽑혔다.
이후 이 명예회장은 오사카를 중심으로 재일동포의 구심점 역할을 하게 된다. 1955년 재일교포 상공인들이 금융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뜻있는 상공인들과 함께 대판흥은(大阪興銀)이라는 신용조합을 설립한다.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1970년대부터 본국투자협회를 설립하는 등 모국 금융업 진출을 추진했으며 1982년 7월 340여명의 재일동포들로부터 출자금을 모집해 신한은행을 설립했다. 이후 1985년 신한증권,1990년 신한생명보험,1991년 신한리스 설립을 주도했다.
이 명예회장은 2006년 신한은행이 조흥은행과 통합한 이후 양 은행 노조위원장을 일본으로 초청해 의견을 교환하는 등 원만한 조직통합에 힘썼다. 1981년 신한동해오픈 골프대회를 시작해 한국 골프 산업에 기여한 것도 그의 업적 중 하나로 평가된다. 이 명예회장은 자신의 사망 사실을 신한금융 주총이 끝날 때까지 알리지 말라며 마지막까지 신한을 걱정했다.
이 명예회장은 생전에 '재물(財物)을 잃는 것은 조금 잃는 것이고,신용(信用)을 잃는 것은 많이 잃는 것이다. 그러나 용기(勇氣)를 잃는 것은 전부를 잃는 것'이라는 좌우명을 신한금융 임직원들에게 강조했다.
유창재 기자 yoocoo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