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포의 일원인 홍성은 1914년 옛 홍주군과 결성군을 합친 곳이다. 홍주목 관아가 있던 홍주도 그때 함께 읍이 됐다. 홍성읍으로 들어서자 홍주성(사적 제231호)의 동문인 조양문이 길 한복판에 서서 나그네를 맞는다. 조양문 왼편으로 돌아가면 홍주 관아의 외삼문 '홍주아문'이 서 있다.

이 아름다운 문을 들어서면 홍성군청이다. 고려 공민왕 때 심었다는 늙은 느티나무와 수인사를 나눈 후 뒤뜰로 가면 홍주목사들이 정사를 보던 안회당과 연못 속의 정자 여하정이 있다. 안회당이라는 이름은 '늙은 사람은 편하게 하고,어린 사람에겐 사랑으로 감싸주겠다(老者安之 少者懷之)'는 《논어》의 한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홍주 의병의 역사가 살아 숨쉬는 홍주성

안회당 뜰은 이름과는 딴판으로 신유박해(1791) 등 천주교 탄압 때마다 신자들을 끌고 와 고문하던 '죽음의 집'이었다. 200여년 전 순교자들의 고통과 한이 오롯이 신원됐기를 기원하며 남벽을 따라 본격적인 성 탐방에 나선다. 장대석을 쌓고 나서 틈새엔 쐐기돌을 박는 조선 전기의 읍성 축성법으로 쌓은 성벽이다. 1451년 축성 당시에는 약 1772m에 달했던 성벽은 이제 겨우 800m가량만 남아 있을 뿐이다.

홍주성은 1906년 3월 을사늑약에 항거해 일어선 의병들이 성 안의 일본군을 6문의 화포로 공격해 퇴각시킨 곳이다. 서울로 가는 길목을 차단당한 일본군은 두 달 후 대대적인 반격을 벌여 의병을 전멸시켰다. 드문드문 박힌 옛 성돌에서 '성 밑에 오두막에/ 푹 엎어져 살던 이들/ 돌 하나 쌓으면 피붙이 흩어지고/ 돌 하나 쌓으면 땅 흔들리던'(신대철 시 '홍주성') 백성들의 피맺힌 흔적을 읽는다.

홍성천 둑 옆 오관리 당간지주(보물 제538호)를 찾아간다. 이곳은 고려시대의 큰 절 광경사가 있던 자리다. 절이 없어진 후 삼층석탑은 홍성여중으로,석불좌상은 용주사로 뿔뿔이 흩어지고 제자리를 지키는 것은 이 당간지주뿐이다. 혼자라서 더욱 당당하고 힘차 보인다.

1906년 5월 일본군의 대반격 때 순국한 홍주 의병들의 유해를 안장한 의사총으로 간다. 1949년 의사총에 모시기 전까지 의병들은 허공을 떠돌던 중음신 신세를 면치 못했다. 의사총 바로 앞 월계천과 홍성천이 만나는 합수머리에는 천주교 홍주순교성지비가 서 있다. 무진박해(1868) 때 순교한 최법상(베드로) 등의 시신이 묻혔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김좌진 · 이응노…근 · 현대사의 별을 찾아

갈산면 행산리,와룡천을 건너자 야산 기슭에 터 잡은 청산리전투의 영웅 김좌진 장군(1889~1930)의 생가가 얼굴을 내민다. 1905년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한 김좌진은 1907년 군대가 해산되자 향리로 돌아와 상촌리에 있던 자신의 90여칸 집을 기반으로 호명학교(현 갈산고 교정)를 세웠다. 그러고 나서 옮겨간 곳이 현재의 생가터다.

1992년에 복원한 생가는 안채 · 사랑채 · 광으로 이뤄져 있다. 종로 낙원동에 세운 오성학교의 교감을 역임(1909)한 연보로 미루어 이 집에서 산 날은 채 2년도 되지 않을 것이다. 민족의식과 자강의식이 어느 곳보다 강했던 홍성.서당 선생 김광호는 의병이나 독립협회 등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등 멘토 역할을 했다. 그에게서 민족의식에 대한 '날카로운 첫 키스'를 받은 소년 김좌진은 마침내 우국과 구국의 길로 떨쳐나선 것이다.

그의 자작시 '단장지통'을 읽으면서도 그 절절한 망국민의 한과 통증을 제대로 느낄 수 없다. 그의 영혼에 미안해하며 홍북면 중계리 고암 이응노 화백(1904~1989)의 생가로 향한다.

이응노 생가는 마을에서 동떨어져 산 아래 홀로 있다. 안채 · 헛간채로 된 갓지은 초가가 눈부시다. 생가 한쪽에선 5월 개관을 목표로 한 기념관 공사가 한창이다.

이응노는 한지와 수묵이라는 동양화 매체를 활용해 '서예적 추상'의 독창적인 세계를 개척했다. 2005년에 문 닫은 서울 평창동 이응노미술관에서 타피스트리(tapestry)에 역동적인 군중의 모습을 그린 '군상 시리즈'를 처음 접했던 순간의 감동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마당에 서자 '충남의 금강산' 용봉산(381m)의 기기묘묘한 암봉이 펼쳐진다. 저 수려한 용봉산이 소년 이응노를 심오한 미의식의 세계로 이끌었던 최초의 내비게이션이었던가.

◆'충남의 금강산' 용봉산에 이룩한 불국토

용봉산 투석봉 아래 상하리 미륵불을 만나러 간다. 키 765㎝,어깨 폭 375㎝의 거대한 이 미륵보살입상은 하관이 넓적한 데다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게 '은진미륵'과 같은 계통이다. 반대편 산자락 병풍바위 아래 가부좌를 튼 신경리 용봉사로 간다. 일주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서쪽 바위로 가서 용봉사 마애불을 찾아뵌다.

신라 소성왕 1년(799)에 조성한 이 마애불은 계란형 얼굴에 흐뭇한 미소를 머금고 있다. 신라 불상의 이상적인 얼굴 특징을 재현한 것이다. 어깨에 닿을 만큼 귀가 길다. 중생의 고통을 알아듣기에 부족함이 없는 귀다.

1905년에 새로 지은 용봉사는 대웅전과 적묵당,용화보전 등의 조촐한 전각뿐인 소박한 절이다. 맨 아래 축대 밑에는 '옛 용봉사 동문회'라도 하듯 직사각형의 커다란 석조,맷돌,돌확 등의 석제 유물들이 한데 모여 있다. 크기로 보아 절의 규모가 어마어마했다는 걸 알 수 있다.

용화보전 옆으로 난 돌계단을 따라 조금 올라가자 용봉사지가 나온다. 옛 절터엔 평양 조씨의 무덤이 들어서 있다. 조선후기 세도가였던 풍양 조씨 가문에서 절을 폐사시키고 조상묘를 쓴 것이다. 절에 불을 지르고 그 자리에 제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쓴 흥선대원군을 벤치마킹한 몹쓸 인간이 또 있었던가 보다.

조금 더 올라가자 4m 거구에 도톰한 얼굴을 한 신경리 마애여래입상(보물 제355호)이 나그네를 맞는다. 왼팔을 가슴 위로 올려 손바닥을 밖으로 향한 시무외인 수인(手印)을 짓고 있다. '나를 믿으면 두려움이 없어진다'는 뜻이다.

이 고려 초의 부처는 아래로 내려갈수록 점점 양감(量感)이 희미해지는 게 흠이다. 불심이 깊던 고려시대 홍주 사람들은 전란 등 온갖 삶의 고비에 부닥칠 때마다 10리가량 떨어진 이 용봉산 봉우리의 마애불을 향해 삶의 두려움에서 벗어나도록 해주십사 기도했을는지 모를 일이다.

건너편의 병풍바위를 바라본다. 우윳빛 화강암들이 제 고운 피부를 마음껏 뽐내고 있다. 이 산은 용봉사지뿐 아니라 숱한 옛 절이 있었던 경주 남산에 못지 않은 불국토였다. 용바위에서 수암산으로 이어지는 유정한 산줄기를 내려다본다. 오늘 하루 이 산에 귀의하고 싶다. 용봉산이여,어서 수제자로 삼아주소서.

안병기 여행작가 smreoquf@hanmail.net

할머니 손맛 담긴 15가지 반찬

◆맛집

'천천히 씹어서/ 공손히 삼켜라// 봄에서 여름 지나/ 가을까지/ 그 여러 날들을/ 비바람 땡볕으로/ 익어온 쌀인데/ 그렇게 허겁지겁/ 삼켜버리면/ 어느 틈에/ 고마운 마음이 들겠느냐/ 사람이 고마운 줄을 모르면,/그게 사람이 아닌 거여.' 이현주 목사의 시 '밥 먹는 자식에게'는 한 끼 식사를 전쟁 치르듯 후다닥 끝마치는 도시 직장인들이 새겨야 할 뜨거운 가르침이다.

홍성읍 대교리 홍주마트 맞은 편에 있는 대동식당(041-632-0277)은 우렁쌈장과 된장찌개가 맛있는 집이다. 한상 푸짐하게 차려진 반찬과 할머니 손맛으로 만들어진 15가지 맛깔스러운 반찬이 나온다. 특히 고추장아찌와 고들빼기 무침이 먹을 만하다. 백반 6000원,우렁쌈밥 6000원,밴댕이찌개 7000원.


아이들과 민속놀이 해볼까

◆여행정보

구항면 황곡리 홍성민속테마박물관(041-632-4660)은 충절의 고장 홍성에 흩어져 있던 여러 가지 민속자료들을 한데 모아 전시하는 공간이다. 이곳에서는 다양한 전시물들을 감상하면서 민속놀이도 즐길 수 있어 아이들의 정서에 여러모로 유익하다. 개관 오전 10시~오후 5시.입장료 5000원.야외 테마체험(바이크 체험,ATV 체험,스카이점핑 체험)과 전통문화 체험(굴레던지기,그네뛰기,널뛰기,촛대ㆍ장승ㆍ연 만들기),먹을거리 체험(두부ㆍ도토리묵ㆍ인절미 만들기)도 재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