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의 정치 불안이 유럽 재정위기 확산이라는 악몽을 되살리고 있다. 포르투갈 의회가 23일(현지시간) 정부의 긴축안을 부결함에 따라 구제금융이 기정사실화되고 있다. 주제 소크라테스 포르투갈 총리는 국정 운영이 불가능해졌다며 사임했고,포르투갈 국채 금리가 치솟으면서 금융시장의 불안이 고조됐다. 24~25일 유럽연합(EU) 정상회의를 하루 앞두고 구제금융 협상 대상자인 포르투갈이 지도부 공백 상태에 빠지면서 EU의 향후 대처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또 국제신용평가사 무디스는 24일 스페인의 30개 은행에 대한 신용등급을 강등했다.

◆포르투갈 수렁 속으로

파이낸셜타임스 등 주요 외신들은 23일 "포르투갈 정부가 자력으로 재정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추진 중이던 긴축안이 여소야대 의회에서 전격 부결 처리됐다"며 "이에 따라 포르투갈이 구제금융 신청에 한발 더 다가섰다"고 보도했다.

포르투갈 제1야당인 중도우파 계열 사회민주당(PSD) 등 5개 야당은 이날 추가 증세와 복지 축소를 골자로 하는 정부의 긴축안을 모두 부결시켰다. 긴축안 부결 직후 소크라테스 총리는 아니발 카바쿠 실바 포르투갈 대통령과 긴급 회동한 뒤 "국정 운영이 불가능해졌다"며 사임했다. 소크라테스 총리는 TV 연설에서 "포르투갈이 자력으로 재정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마련한 조치를 야당이 거부했다"며 "포르투갈이 시장과 외부 기관들로부터 신뢰를 얻어야 하는 상황에서 긴축안이 부결된 것은 매우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포르투갈의 자력갱생안이 부결되면서 금융시장에선 포르투갈이 조만간 구제금융 신청 수순에 들어갈 것으로 보고 있다. 신청 규모는 600억~800억유로로 예상된다.

◆국채 금리 급등…금값 사상 최고

당장 포르투갈 10년물 국채 수익률이 전날보다 0.1%포인트 상승한 연 7.63%를 나타냈다. 안전자산인 독일 국채와 금리차(스프레드)도 4.57%포인트로 벌어졌다. 5년물 국채 수익률은 0.2%포인트 오른 8.18%를 보였다. 장중 한때는 8.2%까지 치솟았다. 1999년 유로존 가입 이후 최고치다.

재정이 불안정한 유럽 변방국들의 국채 금리도 덩달아 뛰었다. 아일랜드 2년물 국채 수익률은 0.38%포인트 오른 10.25%를 기록했다. 그리스 10년물 국채 수익률도 0.04%포인트 오른 12.46%에 거래됐다. 유로화는 약세를 보였다. 유로화는 달러에 비해 0.6% 떨어졌고,엔화에 비해선 0.8% 하락했다.

불안한 투자자들이 안전자산으로 몰리면서 금과 은값은 급등했다. 금 4월물은 뉴욕상업거래소(NYMEX)에서 10.40달러(0.7%) 상승하며 사상 최고치인 온스당 1438달러에 거래를 마쳤다. 온스당 1500달러를 돌파할 가능성도 제기된다. 은값은 93센트(2.6%) 오른 온스당 37.20달러를 기록했다. 장중 한때 온스당 37.29달러까지 값이 뛰기도 했다. 백금과 팔라듐 가격도 각각 1.2%,1.6% 상승했다.

◆대책 없이 삐걱대는 유럽

유럽 재정위기 우려가 커지고 있지만 위기 확산을 막아야 할 EU는 우왕좌왕하고 있다. 당장 24~25일 EU 정상회의에서 포르투갈 문제가 핫이슈가 될 전망이지만,이 문제를 EU 회원국들과 논의할 포르투갈 정권이 공백 상태를 맞았다. 뿐만 아니라 핀란드 역시 4월 총선을 앞두고 의회가 해산돼 EU 공동결정 라인에서 빠져 있다.

2013년부터 현행 유로존 재정안정기금(EFSF)을 대체할 5000억유로 규모의 유럽안정화기금(ESM)의 자금조달 방식이 아직 결정되지 못한 점도 불안을 키우고 있다. 포르투갈 정권 공백으로 합의안 마련이 늦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설상가상으로 유로존 최대 경제대국 독일은 EU 재무장관회의에서 합의한 ESM 출범 일정을 재조정하자고 태도를 바꿔 불협화음을 내고 있다.

지난해 말 EU와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구제금융을 받은 아일랜드가 구제금융 조건을 완화해달라며 독일 프랑스 등과 마찰을 빚는 등 EU는 재정위기 대처에서 일사불란과는 거리가 먼 행보를 보여왔다.

김동욱 기자 kimd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