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 무렵부터 온갖 모양의 가면을 쓴 사람들이 시내에 하나둘 등장하더니,저녁이 되자 무리로 늘어났다. 거리마다 골목마다 가면 천지다. 뿔을 달고 괴물처럼 분장한 사람,동물 머리 모양의 가면을 쓰고 페이스페인팅을 한 어린이와 부모들,수도원에 있어야 할 수녀들도 수도복을 입은 채 시내로 나왔다. 지난 8일,스위스 최대의 관광휴양지인 루체른의 풍경이다.

◆사순절 앞둔 축제 열기

이날은 부활절을 앞두고 40일 동안 예수의 수난을 기억하는 사순절이 시작되기 하루 전.사순절이 시작되면 그리스도가 황야에서 단식한 것을 생각하며 고기를 끊는 풍습이 있기 때문에 그 전 3~7일 동안 고기를 먹고 즐겁게 논다. 이것이 가톨릭을 믿는 유럽 여러 나라의 전통적인 카니발인데 그 어원인 라틴어 '카르네 발레'는 '고기여,그만'이라는 뜻이다. 특히 독일어권에서는 카니발의 마지막 날 '파스트나흐(fastnacht · 금식전야)'라는 축제를 성대하게 벌이는데 바로 이날 루체른에 도착한 것이다.

오후 7시가 되자 가면 · 가장행렬이 시작됐다. 온갖 모양의 가면을 쓰고 요란하게 치장한 사람들이 꼬리를 문 채 북을 울리고 관악기를 불어대며 거리를 행진한다. 이들이 지나는 골목은 구경꾼들로 빼곡하다. 인구 7만인 도시에 20만~30만명이 모여든다고 한다. 시 당국은 가장행렬을 위해 밤 10시30분까지 행렬 구간의 차량통행을 제한했지만 이들의 행진과 풍악은 새벽까지도 이어졌다. 골목 카페와 노점들도 신이 났다. 물가가 비싼 게 흠이지만.

루체른은 스위스 중부의 호반 도시다. 루체른 호수로 알려진 피어발트슈테터호의 서안 로이스강 양편에 도시가 형성돼 있다. 로이스강을 가로지르는 나무다리인 카펠교 너머로 알프스의 영봉인 필라투스(해발 2132m)가 솟아 있고,리기 · 티틀리스 등의 봉우리가 도시를 감싸고 있어 천혜의 자연과 중세풍의 도시가 아름답기 그지없다.

루체른 시내에는 무제크 성벽과 구 시가지 광장,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지붕식 목조다리인 카펠교,용감하게 싸우다 전사한 스위스 용병을 기리며 세운 빈사(瀕死)의 사자상,루체른 역사박물관과 자연사박물관 등 볼거리가 수두룩하다. 빈사의 사자상은 프랑스혁명 때 파리에서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 일가를 지키다 숨진 786명의 스위스 용병을 상징한다. 빙하공원도 빼놓을 수 없다. 빙하공원은 수만년 전 루체른과 스위스 서북쪽 평원을 덮고 있는 빙하가 녹아내리면서 급류에 의해 생긴 소용돌이 구멍과 둥근 바위들 천지다. 공원 내 박물관에서는 루체른의 역사를 볼 수 있다.

루체른 호수는 우르너 · 알프나흐 호수라고 불리는 부분을 포함해 몇 개의 만이 연결돼 굴곡이 복잡하다. 그만큼 호수 주위의 풍경이 환상적이다. 증기선이나 살롱 크루저선이 연중 운행되며 런치 · 디너 크루즈,루체른 하이라이트 크루즈 등 다양한 상품이 마련돼 있어 이용하기 편리하다.

◆필라투스 정상의 알프스 비경

특히 루체른에서 증기선을 이용해 알프나흐슈타트로 가서 빨간색의 귀여운 등산열차를 타고 필라투스에 오르는 것이 유명한데 아쉽게도 그럴 수가 없다. 경사가 최대 48도에 이르는 이 톱니바퀴식 등산열차는 5~11월에만 운행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필라투스의 신비로운 이미지와 눈 아래 펼쳐지는 웅장한 경치를 놓칠 수는 없다. 다음날 아침,루체른 외곽 크리엔스에서 등산열차 반대편 사면을 왕래하는 케이블카를 타고 필라투스에 오르기로 한다. 케이블카는 연중 운행한다. 크리엔스에서 4인승 케이블카를 타고 중간역인 크리엔저에크,프레크뮌테크에 내리니 아직도 겨울이다. 온 산이 눈으로 하얗다.

프레크뮌테크역에서 40인승 케이블카로 갈아타고 급경사를 지나 필라투스에 도착하니 그야말로 일망무제(一望無際)다. 병풍처럼 펼쳐진 알프스의 산봉우리들이 첩첩이 펼쳐져 있고,산 아래로는 루체른 호수가 손바닥처럼 한눈에 보인다. 마침 필라투스 정상 바로 아래의 호텔은 확장 공사 중인데 공사가 끝나는 5월이면 알프스의 전경을 감상할 수 있는 파노라마 갤러리까지 갖추게 된다고 한다.

필라투스에서 다시 크리엔스로 내려오면 케이블카 출발역 바로 앞에 한국식당이 있다.


◆ 여행팁

취리히에서 기차로 약 50분 걸리는 루체른은 규모에 비해 볼거리,체험거리가 많다. 루체른-알프나흐슈타트-등산열차-필라투스 정상-케이블카-루체른 코스의 '골든 라운드 트립'은 기본.중간역에서 내려 산 곳곳의 하이킹 코스와 놀이터,밧줄을 타고 이동하는 로프파크를 즐길 수도 있다.

급경사를 이용한 초고속 눈썰매,산악자전거,패러글라이딩 등의 스포츠도 매력 만점.일반인을 위한 1시간 정도의 쉬운 하이킹 코스를 택해 알프스 초원을 거닐다 바비큐 그릴과 테이블,벤치 등이 갖춰진 피크닉 공간에서 쉬어도 좋다.

다음달 9~17일 열리는 부활절 음악축제를 비롯해 매년 여름 약 4주에 걸쳐 100여개의 연주회가 열리는 루체른 음악페스티벌에 맞춰 일정을 잡으면 더욱 좋다. 1938년 시작돼 세계에서 가장 오랜 국제 음악축제인 이 페스티벌은 토스카니니가 바그너의 '지그프리드'를 초연했던 음악제다.


루체른(스위스)=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