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로'가 외출 나왔다. 즉시 작업을 중단하고 하산하라." 지난달 31일 오후 서울 삼성동 코엑스 컨벤션홀 앞.고층빌딩 청소업체인 고공시스템의 박재근 팀장이 긴장된 목소리로 20m 건물 벽에 매달린 작업조를 향해 소리쳤다. 빌딩 숲에서 부는 돌풍인 '먼로 바람'이 갑자기 들이닥쳤기 때문이다. 할리우드 영화 '7년 만의 외출'에서 마릴린 먼로가 지하철 환기통에서 올라오는 바람으로 인해 스커트가 위로 치솟자 황급히 손으로 가린 유명한 영화 장면을 본떠 붙인 이름이다.

약 5분 후 서른일곱 동갑내기 '로프맨 4총사' 조영현 명동진 문혜선 최동일 씨가 20㎜ 압축 나일론 줄에 의지해 내려왔다. 코엑스 컨벤션홀(지상 4층) 작업에는 긴 줄이 필요 없지만 이들이 보유한 로프 중 가장 긴 것은 300m에 달한다. 둘둘 말면 무게만 50㎏.높이 264m인 타워팰리스를 청소할 때 사용했다.

겨우내 묵은 빌딩의 때를 벗겨내는 3~4월이 이들에게는 대목이다. 한 사람이 1~1.5m의 창문이나 외벽을 닦으며 내려오는 데 걸리는 시간은 30여분.5~6차례 오르내리면 하루 만에 일을 마칠 수 있지만 63빌딩처럼 보름 이상 달라붙어야만 하는 초대형 빌딩도 적지 않다.

"무섭지 않냐고요? 로프에 매달려 앉아 있을 때가 제일 편해요. 다른 사람들도 다 마찬가지잖아요. 서 있는 것보다는 앉아 있는 게 더 편하죠." 군대를 제대하고 잠시 자영업을 하다 10여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로프를 탄 조씨는 "빌딩도 산처럼 높을수록 긴장이 되지만 막상 올라가면 오히려 편안함도 느껴진다"고 말했다.

베테랑 '로프맨'이 손에 쥐는 하루벌이는 15만원 안팎.밑에서 보면 쉬워 보이지만 꼭대기에 올라가면 달라진다. 옥상에 올라가 아래를 한번 내려다보고는 그대로 줄행랑치는 사람이 열에 아홉이다.

경력 10년을 넘는 4총사도 꺼리는 게 있다. 몇 년씩 '목욕'을 안 한 건물들이다. 이들이 '최악의 건물'로 꼽은 빌딩은 종로 국일관."10년 넘게 외벽 청소를 한 번도 안 하다가 민원이 빗발쳐 어쩔 수 없이 청소했답니다. 밖에서 안이 보이지 않을 만큼 새카만데….아무리 문질러도 안 닦이는 거예요".그러면서도 그들은 웃음을 감추지 않았다. 선진국들은 고층 빌딩 외벽을 매년 일정 횟수 청소하도록 의무화하지만 국내에는 아직 그런 규정이 없다.

외벽 청소는 보통 1년에 두 번,봄과 가을에 집중된다. 무역센터,타워팰리스와는 2~3년 장기 계약을 맺고 1년에 몇 차례 청소한다. 그때 그때 일회성으로 맡는 작업을 모두 합치면 이들은 1년에 250일 정도를 로프에 매달려 산다.

외벽 청소를 하는 용역업체는 서울에만 200여개로 추산된다. 위험이 크고 상당한 숙련도가 요구되는 직업이지만 업체가 난립한 탓에 일당이 크게 오르지 않는다고 했다. 요새는 사람 구하기도 쉽지 않다. 경험이 없는 '신참'의 하루 일당은 7만원,일반 건설현장과 큰 차이가 없다.

올해 경력 15년차인 문씨는 "작업 중 추락사가 1년에 10건 정도 발생한다"며 "'로프맨' 자격증 제도를 도입한다면 인명 손실을 줄일 수 있다"며 안전한 작업환경을 위해 정부가 적극 나서달라고 당부했다.

임현우 기자 tardi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