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정당의 생명은 짧다. 평균 수명이 4년 남짓이다. '포차(포장마차)정당'이란 비아냥은 그래서 나온다. 대통령이 되려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헤쳐모여'를 거듭한 결과다. 자연히 대선에서 실패한 직후 사라진 정당이 부지기수다. 정권을 잡으면 그마나 명맥을 유지했지만 다 그런것도 아니었다. 집권하고도 민심을 잃어 스스로 간판을 내린 정당도 있다. 노무현 정권 시절 '백년정당'을 외치며 창당했던 열린우리당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데 걸린 시간은 채 4년이 안 됐다.

이들 정당은 민주적 개념의 정당은 아니었다. 뜨내기 정당의 성격이 강했다. 돈과 공천권을 가진 실력자의 부침에 따라 정당의 운명이 갈렸다. 눈 앞의 대권에만 올인했을 뿐 국민의 사랑을 받는 백년정당을 만들려는 노력이 없었던 탓이다.

정당의 사전적 의미는 '정치권력의 획득을 목표로 정치적 견해를 같이하는 사람들이 공통된 정책에 입각해 일반적 이익을 증진시키고자 결합한 정치결사체'다. 권력을 잡기위해 모인 건 100년 이상의 전통을 지닌 서구정당과 다를 게 없다. 근본적인 차이는 공통된 정책이다. 정책은 이념적 좌표다. 보수냐 진보냐를 가르는 기준이기도 하다. 미국의 민주당과 공화당이 나뉘는 것이나 영국의 보수당과 노동당을 가르는 것 또한 정책의 색깔이다. 한마디로 정책은 정당의 뿌리다.

현존하는 우리나라 정당 중 최장수 정당은 한나라당이다. 1997년 창당돼 이제 13년8개월째를 맞았다. 두 번의 대선 실패를 딛고 여기까지 왔다. 10년 만에 정권탈환의 꿈도 이뤘다. 전문가들은 "한나라당이 이제까지 명맥을 이어온 건 보수정당이라는 색깔 덕분"이라고 입을 모은다. 50대 이상,영남의 확고한 보수층의 지지가 버팀목이 돼 왔다. 그랬다. 적어도 2007년 대선과 2008년 총선은 어려움없이 낙승했다.

그런 한나라당이 흔들리고 있다. 지난해 지방선거 참패 이후다. 최근엔 수도권을 중심으로 위기감이 팽배하다. 한 수도권 의원이 "이런 분위기로는 내년 총선서 서울 48석 중 10석을 건지면 성공"이라고 토로할 정도다. 민심이반에 한나라당이 찾고 있는 탈출구는 표를 겨냥한 포퓰리즘이다. 당의 색깔에 맞지 않는 정책을 쏟아내고 있다.

요즘 한나라당을 보면 '부자'라는 단어에 노이로제가 걸린 듯하다. 이명박 정부의 핵심정책인 감세정책을 '부자감세'라는 야당의 공세에 사실상 철회했다. "부작용이 크다"며 반대했던 전 · 월세 상한제도 도입키로 입장을 갑자기 바꿨다. 전 국민 70% 복지와 징벌적 손해보상제도 도입도 포퓰리즘 정책이긴 마찬가지다. 한발 더 나아가 시장원리에 반하는 '초과이익공유제'를 공개 지지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표가 되면 뭐든 할 태세다.

이러다간 민주당 일각에서 주장하는 부유세를 신설하자는 얘기가 나오지 말란 법도 없다. 우선 살아남고 보자는 식의 '표만능주의'에 빠져 좌(左)클릭을 거듭하다보니 이제 '개혁적 진보'를 자처하는 민주당의 정책과 별반 다를 게 없다. 한나라당이 점점 보수색깔을 잃어가고 있다. 한마디로 심각한 정체성 위기다.

선거에선 이길 수도 질 수도 있다. 민심도 마찬가지다. 정체성은 다른 문제다. 정체성은 당의 존립 기반이자 존재 이유다. 정체성을 잃고 어디에 표를 달라고 할 것인가. 요즘 한나라당을 보면 자신의 색깔 없이 사라져간 수많은 뜨내기정당의 대열에 동참하려는 건 아닌지 궁금하다.

이재창 정치부장 leejc@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