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통신회사인 BT는 1996년 중 · 장기 탄소배출량 감축 계획을 발표했다. 2015년까지 탄소배출량을 80% 줄이겠다는 내용이었다. 1980년대 40조원이 넘는 적자를 기록하며 경영위기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던 회사로서는 꿈도 꾸기 어려운 야심찬 계획이었다. 투자 여력이 없지만 어떻게 해서든 탄소를 줄여야 지속가능한 성장을 도모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 그린 '큰 그림'이었다.

구체적인 탄소 절감 실천방안을 짜내는 과정에서 BT가 찾은 돌파구는 근무형태 혁신이었다. 일하는 방식을 획기적으로 바꾸면 가능할 것이란 결론을 내린 것이다. BT의 고유한 스마트워크인 '애자일 워킹(agile working · 민첩근무제)'은 이렇게 탄생했다. 근무형태를 바꾸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그린(green) 경영' 혹은 '지구적 책임'이라는 철학적 화두가 먼저였다는 얘기다.



#BT의 '애자일 워킹'



기업이 탄소를 줄일 수 있는 방법은 세 가지다. 우선 생산활동에서 탄소를 감축하는 방법이 있다. 탄소를 유발하는 공정이나 기계를 줄이고 환경친화적인 기술을 도입하고,탄소절감형 기계를 쓰는 것이다. 녹색 에너지,녹색 기술 등이 키워드인데 문제는 돈이 많이 들고 기술 발전을 기다려야 한다는 점이다.

또 다른 방법은 공장을 포함한 사무공간을 줄이는 것이다. 사무실 크기를 줄이고 직원들의 고정 좌석을 없애는 과정에서 탄소를 줄일 수 있다. 마지막으로는 공간과 공간 사이를 이동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탄소를 줄이는 것이다. 재택근무를 하면 출퇴근 차량이 내뿜는 탄소를 그만큼 없앨 수 있다. 영업사원이 굳이 본사에 들어가지 않고 퇴근하는 것,한군데 모이지 않고 화상회의를 하는 것 등이 공간 이동에서 발생하는 탄소를 줄이는 처방이다.

BT는 세 가지 방법을 모두 사용하되 특히 공간을 줄이고 이동을 줄이는 방법에 집중했다. 일하는 방식을 완전히 바꾸기로 결론을 내렸다. 이렇게 시작된 BT의 '애자일 워킹'은 직원과 고객의 만족도를 동시에 높이며 탄소를 획기적으로 절감하는 방법으로 세계의 주목을 받게 됐다.

BT에선 현재 전 세계 10만5000여명의 직원 가운데 7만3000여명이 '애자일 워킹'으로 일하고 있다. 이 가운데 1만5000여명이 재택근무자이고,유연근무제로 일하는 엔지니어도 3000여명이나 된다. 성과도 많이 올렸다. 유연근무제로 일하는 사람들의 생산성이 20% 향상됐다. 공간 축소로 인한 부동산 유지 비용 감소액도 연평균 7억5000만여파운드에 이른다. 자녀 입학, 병 간호 등 때문에 높았던 결근도 63%나 줄었다. 출산휴가 후 복귀율은 99%에 달한다. 재택근무 현장근무 등으로 출퇴근 이동을 획기적으로 줄였다. '애자일 워킹'을 통해 없앤 출퇴근 횟수는 150만회에 이른다. 이를 통해 연평균 1200만여ℓ의 연료를 줄였다. 또 각종 출장을 없애면서 연 평균 3900만파운드의 예산을 절감했다. 이 결과 1996년부터 2008년까지 탄소절감률은 58%에 달한다.

BT코리아 사장을 지낸 김홍진 KT 부사장(STO추진실장)은 "BT는 탄소를 줄이기 위해 여러 가지 방안을 진지하게 고민한 끝에 근무형태를 획기적으로 바꿔야겠다는 결론에 이르게 됐다"며 "그 과정에서 성과가 높아지자 오히려 '애자일 워킹으로 고객에게 최적의 서비스를 제공하자'는 식으로 새로운 목표를 세우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정부와 민간이 2015년까지 전국에 500개를 세우기로 한 스마트워크센터의 경우도 "회사 사무실의 자기 공간은 그대로 두고 스마트워크센터도 사용하게 한다면 탄소 절감과는 거리가 먼 잘못된 방향"이라고 강조했다.

#스마트워크는 목표가 아니라 수단



스마트워크는 기업 차원에서는 경영철학을 구현하는 방법이고,더 넓게 보면 사회적 변화를 담아내는 수단이기도 하다. 근무형태를 바꾸는 것이 먼저가 아니라 사회가 바뀌었기 때문에 그 흐름을 직장사회의 혁신으로 연결시키는 과정에서 스마트워크가 하나의 방편으로 고려돼야 한다는 얘기다.

21세기 들어 더욱 가속화되고 있는 사회적 변화의 대표적인 사례는 핵가족의 보편화,여성들의 광범위한 사회적 진출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아이를 낳아 키우고 혹시 병이 생기면 간호하는 등 일련의 가정 활동에서 예전과는 달리 갑자기 생기는 위기 상황이 많아질 수밖에 없다.

주5일 근무하고,매일 오전 9시에 출근해 오후 6시에 퇴근하고,연간 한정된 날을 휴가로 쓰는 기존의 근무형태로는 이런 위기 상황에 대처할 방법이 별로 없다. 예를 들어 가족 가운데 환자가 생겨 2~3개월간 간호해야 할 경우 현재의 방식에선 회사를 그만두는 것 외에는 별 도리가 없다.

최근에 많이 일어나는 일로 보면 아이들이 막 취학해 적응하지 못할 경우 엄마는 일을 그만두고 몇 개월간 적응훈련을 도와줘야 한다. 좀 더 구체적인 예를 들자면 1주일에 이틀씩 치과를 가야 하는 아이를 매번 엄마가 데려다주고 같이 앉아 있어야 하는 일도 있다. 이런 모든 것이 주부 사원의 직장 생활을 위협하는 '위기'가 되는 것이다.

현재의 근무형태라면 가족의 크고작은 위기 국면에 유연하게 대응할 수 없다. 그 결과 전도양양한 직원들이 할 수 없이 회사를 그만둬야 하는 일이 생길 수밖에 없다. 회사로서도 수년간 길러놓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예외를 인정해줄 수 없어 내보내고 마는 것이다.

스마트워킹의 한 방편으로 유연근무제가 정착돼 필요시 유 · 무급 휴가를 쓸 수 있게 된다면 인생의 중요한 순간에 직업을 포기하는 일 없이 계속 일할 수 있게 된다. 직장인에게 회사가 줄 수 있는 최고의 혜택은 직업을 유지하도록 해주는 것 아닐까.

위기 상황이 아니어도 스마트워크를 통해 많은 사람이 재충전의 기회를 갖는다면 그것만 해도 큰 혜택이 된다. 대기업 임원의 반열에 오른 성공적인 직장인 가운데 1개월 이상 쉬어본 사람이 한국에는 없다고 보면 된다. 그러나 새로운 세력으로 떠오르고 있는 여성 직장인들은 어떻게든 양립할 수 있기를 원한다. 이런 사회적 변화가 있고 그것을 담아낼 수 있는 그릇으로 스마트워크를 봐야 한다는 얘기다. 스마트워크는 그러니까 목표가 아니라 수단이다. 탄소 절감,여성 직장인 복지 등과 같은 새로운 경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근무형태를 바꾸는 것이고 구체적인 실천 방향은 회사마다 다를 수 있는 것이다.

#일하고 일 시키는 방식도 바뀌어야


정부가 스마트워크를 추진하는 목표는 분명히 있다. 그러나 스마트워크 자체가 목표가 아닌 만큼 무엇을 위해 스마트워크를 하는지를 명확히 해야 한다. 여러 가지를 생략하고 말하자면 우리는 일을 더 잘하기 위해서 스마트워크를 추진해야 한다. 이왕에 스마트워크를 하려면 그래서 지금까지 우리가 유지해온 일하는 방식,그리고 일 시키는 방식을 바꾸는 것부터 고려해야 한다. 생각해보라.우리는 일하는 시간이 세계 최고 수준이면서 생산성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가운데 중위권 수준에 불과하다. 뭔 얘긴가. 우리가 지금까지 해온 일하는 방식이 잘못된 것 아닌가,큰 변화가 필요하지 않나.

같은 한국에서 일하면서도 주한 외국 기업의 경우는 직원들이 휴가를 다 쉬고,정시 퇴근하면서도 오히려 성과가 낫다면 우리가 해오던 방식이 문제가 있다는 얘기로 알아들어야 한다. 어떤 것이 잘못일까. 반드시 얼굴을 보고 회의를 해야 하고,강남에서 주로 영업하는 사람이 강북 사무실에 출근했다가 나가고,또 복귀한 뒤 퇴근하는 방식이라면 근무 시간은 길어도 성과가 오를 방법이 없다. 조소적으로 얘기하면 우리 사회가 일하는 방식은 엄마가 공부시켜서 할 수 없이 책상에 앉아 졸고 있는 학생과 같다.

실제로 한국에서 일하는 외국인 회사의 한 임직원의 말을 들으면 이는 실감나는 현실이다. "일이 있는 사람은 한 사람뿐인데,전부 옆에서 집에 못 가고 앉아 있다. 처음엔 의리가 있어 보였지만 결국 욕먹기 싫어서 그러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 시간에 집에 가서 쉬고 오는 게 낫지 않은가. "

집단주의 문화가 강한 한국의 경우는 비(非)스마트한 워크가 그만큼 많다는 뜻이다. 직원들은 온라인으로 협업을 하는데 부서장은 반드시 프린트물로 보고받아야 하는 경우,아이패드 등으로 회의를 해도 되는데 모두들 같은 방에 앉아 있는 게 현실이다. 모두가 일하는 방식,일 시키는 방식이 변해야 한다는 뜻이다. 지금의 일에 문제가 있으면 새로운 방식을 쓸 수밖에 없다. 스마트워크는 쓸데없는 일이 아니라 제대로 된 일을 제대로 하기 위한 새로운 방식이다. 쓸데없는 일을 하지 못하도록 아예 일 시간을 줄이는 것도 스마트워크의 한 방법이다.

탄소 절감 혹은 '그린 경영'이라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 근무 형태를 혁신적으로 바꾼 BT의 경험을 볼 때 이제 본격적으로 스마트워크를 추진하는 한국으로서는 그 철학적 기반에 더 많은 관심을 쏟아야 할 것이다. 공간을 줄이지 않고,출퇴근을 줄이지 않고,단지 스마트폰을 쓰고 온라인 회의만 많이 한다면 그것은 형태만 스마트워크일 뿐이고 오히려 새로운 부담이 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약력

▷연세대 철학과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 MBA

▷저서=경영자를 위한 변명,심플의 시대 등

▷역서=위대한 기업을 넘어 사랑받는 기업으로,경영의 미래,피터 드러커의 리더스 윈도우,경영이란 무엇인가 등



/권영설 한경아카제미 원장 yskw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