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르릉….새벽 잠을 깨우는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지난 2월 중순 울산지역에 폭설이 내릴 때였다. 울주군 온산읍에 있는 한국제지 온산공장엔 비상이 걸렸다. "부공장장님 큰일 났습니다. 기계장치에 이상한 잡음이 들립니다. 게다가 폭설로 물류창고가 내려앉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

남기영 한국제지 이사(41 · 사진)는 꼭두새벽에 생산현장에서 걸려온 당직자의 비상호출을 받고 곧바로 출동했다. 울산기상대 관측 이래 80년 만에 가장 많은 눈이 내렸기 때문이다. 남 이사는 "부공장장 직을 맡은 뒤 비상호출 전화를 처음 받았을 때는 얼마나 놀랐던지 얼굴도 씻지 않은 채 회사로 달려갔다"고 당시 상황을 이야기했다.

비상호출이 잦아지자 남 이사는 아예 밤샘근무를 했다. 남자직원들과 함께 공장 이곳저곳에 쌓인 눈을 직접 치웠다. 남편의 불평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 같은 억척스러움을 지켜본 회사는 부공장장이 된 지 3개월도 안된 그를 이사로 선임했다. 파격인사였다. 제지업계 여성 임원은 남 이사가 처음이다. 입사 동기인 다른 남자 동료들도 제쳤다.

남 이사는 "1년여 동안 공석으로 있던 부공장장 자리를 맡게 된 것만 해도 몸둘 바를 모르겠는데 이사로 선임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며 "제지업계 첫 여성 임원으로서 부끄러움이 없도록 업무 혁신과 조직 융합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강원대 제지공학과 1회 졸업생이다. 학부는 물론 대학원에서 제지공학 박사학위까지 땄다. 1995년 한국제지 연구원으로 입사한 뒤 15년 동안 인쇄용지 품질 개선 분야에서 뛰어난 연구 성과를 거뒀다. 물에 잘 견뎌야 하는 맥주와 소주 라벨지의 품질을 혁신한 것이 대표적이다. 2004년에는 미국과 호주에서 최고급 친환경 인쇄용지로 인정받은 프리미엄 아트지를 만들어 냈다.

2006년 남 이사가 개발한 복사지 '하이퍼CC'는 태국 중국 등 외국 제품을 제치고 시장 점유율 1위를 차지하고 있다. 남 이사는 이를 기반으로 수입 컬러 전용지와 품질은 같지만 가격을 절반 이상 낮춘 보급형 컬러 프린트지 '하이퍼CC 프로'와 눈의 피로를 덜어주는 미색 복사지 '하이퍼CC 미색',레이저 전용지 등도 잇따라 개발했다.

남 이사의 연구 개발 성과는 당시 대대적인 설비 투자로 영업 적자를 냈던 회사 손익을 흑자로 돌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는 400여명에 이르는 온산공장 전체 직원의 생일을 모두 기억할 정도로 탁월한 친화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가 부공장장이 된 뒤 공장 내부 바닥은 티끌 한점 찾아내기 힘들 만큼 깨끗해졌다. 함께 일하는 서승석 온산공장장은 "이산화탄소를 공정에 재활용하는 등 탄소 제로화를 실현하고 있는 한국제지 브랜드 이미지와 너무나 잘 어울리는 순백색 공장 경영인"이라며 남 이사를 치켜세웠다.

울산=하인식 기자 hai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