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밖이었다.73세의 노화백이 첨단 아이패드를 갖고 다니다니.적갈색 가죽 커브를 젖히고 능숙하게 터치하는 손길이 신세대 같다.화면을 열자 독도의 영상이 화려하게 펼쳐졌다.하늘에서 찍은 항공사진처럼 빙빙 돌아가며 독도의 속살을 비추는 3D(입체)영상이 생생하다. 1977년 최초로 독도를 그린 이후 40년 가까이 ‘독도문화심기운동’을 펼치고 있는 한국화가 이종상 서울대 명예교수(예술원 회원).그는 몇 년 전 도쿄에서 독도 그림전을 열기로 했다가 일본 극우파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지만 아직도 꿈을 접지 않고 있다.이미 ‘독도의 기 II’를 최고급 실크스카프로 만들어 신주쿠 화랑에서 일본 여성들을 홀린 적도 있지 않은가.틈만 나면 망언을 일삼는 일본의 심장부에서 여성들이 한국작가의 ‘독도’ 스카프를 목에 두르고 다니는 진풍경은 생각만 해도 웃음이 나온다.그의 독도 작품으로 만든 접시와 기념품 목걸이는 문화상품이 됐다.정부에서도 국제행사가 있을 때마다 국빈들에게 선물할 정도다.

그가 독도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 "한국의 그림은 겸재 정선 이후에야 비로소 우리것을 찾았지요. 그 전에는 중국 대륙의 오악사독(五嶽四瀆 · 다섯 개의 산과 네 개의 대하)을 따라하는 게 주를 이뤘습니다. 겸재의 진경산수(眞景山水)가 나오면서 '인왕제색도' '총석정' '금강산도' 같은 역작이 빛을 보기 시작했죠.그 진경 정신을 실천하기 위해 우리 산천을 발로 그려보는 고행길에 나섰어요. 그 시작점이 서해안의 백령도와 강화도 외포리,송도 등이었습니다. 그렇게 훑어 제주도를 돌고 동해안으로 북상했는데 철책에 막혀 더 이상 못가고 울릉도로 향했어요. 그곳에도 또 못들어가는 섬이 있었던 거죠."

1970년대에는 지금과 같은 독도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었다. 몇몇 역사가나 지리학자가 독도의 고지도를 찾는 게 거의 다였다. 그는 그중 한 명에게 "지도의 어버이는 곧 그림"이라며 "옛날 지도는 산수화의 삼원법(고원법 · 심원법 · 평원법)을 활용해 평면에 표시한 3D영상이었다"고 설명했다. 그걸 독도에서 그림으로 완성하고 싶었다. 그러나 독도에 들어가는 일은 비자를 내는 것만큼 까다로웠다.

"당시 치안본부에 전후사정을 얘기하고 여러 명의 신원보증을 받는 등 복잡한 절차를 거쳐 치안본부 고위 인사와 함께 해양경찰청 배를 타고 떠났습니다. 새벽에 출발해 독도에서 해돋이를 봤는데 그 감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어요. 해가 뜬 다음에 물안개가 퍼지는 장면도 정말 장관이었죠."

이때부터 그는 독도를 자주 드나들었고 독도 그림 전시회도 열었다. "지금까지 34차례 갔죠.그중 14회만 독도에 발을 디뎠어요. 독도는 아무 때나 문을 열어주지 않거든요. 다음달에 또 갑니다. 이번에 성공하면 15회가 되는 거죠."

그는 독도의 문화적 상징성을 깨달은 최초의 예술인으로 꼽힌다. "일본 후지산 정상에는 사람이 살지 않지만 톱날 같은 정상에 흰눈만 칠해 놓으면 누구나 후지산을 연상하죠.A자만 봐도 파리의 에펠탑을 연상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시각적 형상 인지력은 참으로 무서운 문화의 힘이 됩니다. 우리 독도의 이미지를 세계인에게 심어줄 수 있는 그림을 한국 화가의 손으로 그려낼 수는 없을까 끊임없이 고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요. "

어떻게 하면 문화 불모지인 독도에 문화를 심을 수 있을까. 그는 독도문화심기운동을 펼치는 것도 독도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시작했다고 했다. "독도는 외로운 섬,막내섬이 아닙니다. 독도(獨島)의 '독'은 '돌'의 방언이에요. 고대국어의 음운체계인 '이두음(吏讀音)'의 원리를 모르고 그냥 외로운 섬이라고들 하는데 안타깝습니다. 독도는 체구가 작지만 울릉도보다 약 1만년 전에 태어난 섬입니다. 제주도보다도 일찍 생겼죠.지질학적으로 맏형인데 자꾸 막내라고 하니 거 참…."

그의 별명 중 하나는 '독도교주'다. 독도로 가는 배 안에서 사람들에게 지겨울 정도로 '설교'를 하기 때문에 붙은 별명이다. "대개 독도에 들어가는 사람들의 마음은 호기심으로 가득하죠.적은 돈으로 명분도 서고 남이 안 가본 곳을 관광하는 기분도 특별하고,그런데 '당신들은 독도를 크게 오해하고 있다. 독도를 지킨다는 생각을 버려라'고 얘기합니다. 삼국을 통일한 문무대왕이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며 동해에 수장해 달라고 유언한 이유를 생각해봐라.삼국유사에도 나오잖나. 이러면서 독도 문화론을 펼치는 거죠."

그는 독도를 '하나도 됐다가 둘도 됐다가 셋도 됐다 하는 요술섬'이라고 표현한다. 한 바퀴 돌면서 스케치할 때 보면 전혀 다른 섬처럼 새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러니 마음을 깨끗이 하고 독도를 찾아가야 한다고.그의 민족적 문화운동은 '고구려문화지키기운동'과도 맞닿아 있다. 1960년대부터 중국의 '동북공정'을 예견하고 벽화 연구에 빠진 그는 1972년 '한국문화논총'에 고구려문화 자생론을 주장하는 논문을 발표했다가 사회주의 작가로 몰려 가택 수색과 함께 정보기관에 연행되기도 했다.

그는 예산 갑부집 아들로 태어나 6 · 25 직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나무꾼 생활로 근근이 생계를 꾸렸다. 어머니는 광주리 장사에 나섰다. 대학 시절에는 서울역에서 노숙하며 공부했다. 그 덕분에 노숙자와 노동자들이 모델이 돼 줬다. 23세에 최연소 국전 추천작가가 될 때도 그들의 도움을 받았다.

서울대 교수 시절 동국대 철학과 3학년으로 학사편입해 철학박사 학위까지 받은 것도 '생각하는 그림' '정신이 빛나는 회화'의 중요성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1997년 프랑스 문화부의 초청으로 루브르박물관 카루젤 초대 개인전을 가졌을 때의 일화다. 루브르의 입구인 유리 피라미드 아래에 반쯤 무너진 성벽이 있는 전시공간에 그는 병인양요 때 약탈당한 문화재를 떠올리는 작품을 설치했다. 외부 조명과 못박기,소음,위치 변경,성채 차단 행위를 불허하는 조건에서 무너진 성벽 위에 강화 마니산의 이미지를 배면조명(背面照明)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72m짜리 대작이었다. 개막과 함께 전원을 연결하자 마니산 화면이 대낮처럼 빛을 발산했다. 그 모습에 관람객들은 '판타지아!'를 연발했다.

그는 그 자리에서 프랑스 극동함대의 강화도 침략과 외규장각 도서 약탈 등의 만행을 지적했다. 그들은 놀랐다. 오히려 설치벽화를 세 번이나 연장 전시하자고 했다. 관람객 수는 127만명이나 됐다. 마감일이 다가오자 영구 비치 제안이 들어왔다. 구입 액수도 엄청났다. 그러나 그는 "우정권과 경인철도권을 확보하고 문화재까지 약탈했으니 내 작품을 영구 비치하고 싶다면 외규장각 문화재를 반환하라.그러면 내 작품을 무상으로 루브르에 기증하겠다"고 했다. 얼마 후 "정치적인 문제여서 문화부가 답변하기 어렵다"는 대답이 돌아오자 그는 "한국 작가의 문화적 자존심으로 억만금을 준다 해도 팔지 않겠다. 철수하겠다"고 전하고는 제자들을 시켜 몸싸움을 해가며 작품을 철거해 버렸다.

그가 파리 그랑팔레에서 우리나라 이름을 걸고 개인전을 열 때의 얘기도 재미있다. 백남준 비디오아티스트는 왼쪽에 있었고 볼프 보스텔이 독일 간판을 걸고 오른쪽에 있었는데 보스텔이 그의 '장판 그림'을 보고 놀라 물었다. 그는 "한국에서만 만드는 장지를 눕혀 놓고 그린 것인데 노란색은 치자와 콩댐으로 만들었다. 물 묻은 휴지로 문질러도 이상이 없다. 그 위에 가구나 문갑 따위를 올려 놓고 햇빛을 받게 했다" 등의 설명으로 그를 '기막히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작품이 비싸고 희귀하겠다"는 말에 "비싼 건 맞지만 한국은 어느 집이나 이런 대작을 몇 점씩 갖고 있다"고 해 다시 한번 기를 죽였다고 한다. 게다가 "이 작품은 구들장을 만들어 항상 불을 때야 가능하다"고 해서 두손을 들게 했다.


◆ 5만원권 신사임당 보더니 처음엔 '기생' 같다고 난리였죠

5천원권 율곡까지 그린 '화폐 영정화가'

"5만원권의 신사임당(申師任堂) 그림을 공개한 뒤 맨 처음 나온 반응은 '기생 같다'였어요. 혹평이었지요. 그 다음엔 '주막집 주모에 알맞을 얼굴'이라고 하더군요. 거의 날마다 악평이 이어지니까 집사람도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저는 '천한 기생에서 주모로 한 단계 올라갔으니 가만히 놔둬보자'고 했지요. 신분이 한 계단씩 계속 올라갈 거라고 말이죠.나중엔 '박근혜 닮았다'는 얘기가 나오더니 급기야 '육영수 여사 같다'는 말까지 나왔어요. 가만히 놔뒀는데 세상 사람들이 저절로 업그레이드를 시켜주더군요. 하긴 기생과 주모를 거쳐 '공주'에 '왕비'로 수직 상승했으니 예감이 맞긴 맞았습니다. 하하."

이종상 화백은 5만원권뿐만 아니라 5000원권의 율곡 이이(李珥)까지 그린 국내 유일의 생존 '화폐영정 화가'이기도 하다. 37세 때 율곡을 그린 지 34년 만에 그의 어머니 신사임당까지 '모자(母子) 위인'을 함께 그렸으니 화가로서도 대단한 행운이다.

5만원권의 인물은 그의 스승인 이당 김은호 선생(1892~1979)의 신사임당 표준 영정을 밑그림으로 삼은 것이다. "머리 모양과 복식은 전문가의 고증을 거쳐 바꿨고 얼굴도 약간 측면으로 각도를 틀면서 입술과 눈동자 등을 다시 그려 완성했습니다. 신사임당이 현모양처나 요조숙녀라기보다는 개화기 때 나혜석과 같은 당대의 신여성이었고 화가였다는 점에 초점을 맞춘 거죠."

그는 "화폐용 영정을 그리면 처신에 신중해야 하기 때문에 신사임당 그림을 완성할 때까지는 아내에게도 비밀로 했다"며 "화폐 영정 작가를 만나면 '돈복'이 많다고 해서 집으로 찾아오는 사람도 많았다"고 말했다. 율곡 영정을 그린 뒤에는 주례 부탁까지 폭주해 거절하느라 애를 먹기도 했다고 한다.

"돈은 벌고 모으는 것만큼 가치있게 쓰는 게 더 중요합니다. 돈을 잘 쓰면 100원으로도 1만원 값어치를 할 수 있지만 잘못 쓰면 그 반대가 되지요. 운보 김기창 선생은 이걸 '돈의 마술'이라고 하더군요. 늘 얘기하지만 돈은 수단이지 결코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물론 돈을 귀하게 여길 줄도 알아야 하지요. "

만난사람 = 고두현 문화부장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