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 버냉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이 정례 기자회견을 갖기로 한 것은 시장과의 소통을 강화하려는 취지다. 최근 각종 경제 현상을 두고 통화당국과 시장 간 인식 차이가 커지는 점을 감안하면 시의적절한 제도로 평가할 수 있다. 월가는 오는 27일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회의 직후 열리는 첫 브리핑에서 버냉키 의장이 시장과의 갭을 어느 정도 메울지 주목하고 있다.

가장 뚜렷한 인식차이를 보이는 게 인플레이션이다. 버냉키 의장은 최근 한 금융 콘퍼런스에서 "물가상승 압력은 일시적"이라고 진단했다. 국제 유가 상승에 따른 영향이 제한적일 것이란 분석에 의한 것이다. 하지만 시장은 인플레이션 우려가 갈수록 현실화될 것이라며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 빌 그로스 핌코 최고투자책임자(CIO)는 버냉키 의장의 인식이 지나친 낙관론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비판했다.

실제로 서비스 및 상품 가격이 전반적으로 오름세를 보이는 가운데 원가 부담을 소비자 가격에 반영하겠다는 기업들이 늘고 있다. 월가 금융회사들이 변동성이 큰 에너지와 식품을 제외한 근원 소비자물가상승률 전망치를 일제히 끌어올린 이유도 여기에 있다.

기대 인플레이션도 커지는 추세다. JP모건체이스가 최근 금융전문가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1년 후 기대인플레이션(근원물가 기준)이 1.8%로 작년 11월 조사 때보다 0.4% 포인트 높아졌다. 중동 사태 장기화로 국제 유가 상승세가 지속되면 기대인플레이션이 가파르게 상승할 가능성이 크다.

엘런 멜처 카네기멜론대 교수는 체감 물가에 비해 소비자물가지수가 안정된 것처럼 보이는 것은 주택가격 하락 영향이 크다고 분석했다. 주택가격과 주택 관련 비용(모기지,재산세) 등이 소비자물가지수(CPI)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40%에 달하는 만큼 주택가격 하락이 물가상승 압력을 오도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그런데도 버냉키 의장이 물가상승 우려를 배제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물가와 함께 FRB의 또다른 정책 목표인 고용이 여전히 불안하다고 판단해서다. 버냉키 의장은 최근 4개월 동안 실업률이 1.0%포인트 떨어졌지만 고용여건이 여전히 취약하다고 보고 있다. 실업률이 떨어진 것은 민간 부문에서 일자리가 증가한 덕분이기도 하지만,실제로는 구직 포기자가 증가한 데도 기인한다. 2007~2009년 사이 일자리를 잃은 55~64세의 고령 실업자 중 21%가 구직을 포기했다. 1년 새 임금상승률은 1.7%로 소비자물가 상승률을 밑돈다.

버냉키 의장은 이런 상황에서 국제 원자재 가격 충격이 임금과 물가상승의 악순환으로 이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듯하다. 적어도 이머징 국가의 구조적 인플레이션 현상이 미국에서 빚어질 가능성은 낮다는 것이다.

하지만 고용시장이 살아나지 않는 한 물가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인식은 지나치게 단선적이며 한참 전에 학계에서 폐기한 '필립스곡선(임금상승률과 실업률 간 역의 상관관계)'을 꺼내드는 인상을 준다. 게다가 미국 고용 구조의 변화를 제대로 읽지 못한 탓이기도 했다. 세계 경제 통합으로 미국 고용시장의 위기는 경기 사이클과 무관하게 지속될 수 있다. 중국 같은 이머징 국가 노동자와 경쟁해야 하는 미국 비숙련 노동자들은 갈수록 설 땅을 잃어가고 있어서다.

바뀐 경제 구조에 대한 올바른 고민없이 고용 여건만 보고 물가상승 압력 신호를 무시하는 태도는 통화당국의 신뢰를 떨어뜨릴 수 있다.

뉴욕/이익원 특파원 ik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