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부인은 암달러상으로부터 18만달러를 100달러짜리로만 구입했다. 숨길 장소가 마땅치 않아 애를 태우던 신씨 부부는 식구들이 곤히 잠든 새벽에 일어나 정원을 파고 묻었다. 불안은 겹쳤다. 혹시 썩을까봐.10일 만에 꺼내 천장 속에 숨겼다. 이번엔 화재 위험이 도사렸다. 궁리 끝에 벽을 파내 금고를 만들고 겉은 파란색 벽지로 감쪽같이 발라놓았다. '

1975년 6월4일 동아일보 기사다. 망한 회사 대표로 재산을 빼돌렸다 들킨 신모씨 사건을 다룬 이 기사는 이렇게 이어진다. '가로 30㎝ 높이 15㎝ 금고 속엔 헝겊 전대 3개가 있었다. 전대엔 100달러짜리 4만5500달러가 골고루 담겨 있었다. '

신씨네는 김치통에 넣은 다음 비닐로 싸서 묻는다는 생각은 못했던 게 틀림없다. 당시로선 거액이었다지만 100달러짜리 1800장이라야 통 하나면 됐을 텐데 말이다. 하기야 예전엔 장독에 넣는 정도가 고작이었으니 다른 수단은 떠올리기 어려웠을지 모른다. 김치통도 없었을 테고.

아무튼 예나 지금이나 부정한 돈은 은행 등 금융회사에 맡기지 못하고 따로 숨겨야 하는 모양이다. 문제는 장소와 방법이다. 돈 숨기기는 액수에 상관없이 간단하지 않다. 비상금 몇 만원 감추느라 신발 바닥부터 넥타이 안쪽,휴대폰 본체와 배터리 사이,책,철 지난 옷주머니 등 온갖 곳을 찾아내는 게 현실이다.

액수가 커지면 고민도 커진다. 6 · 25를 겪은 세대의 경우 만일의 사태에 대비,현찰을 쥐고 있어야 한다는 믿음에 집안 곳곳에 돈을 숨겨두는 일이 다반사였다. 이불과 요,베개에 넣거나 장판 밑에 까는가 하면 천장이나 장롱 위,쌀독과 소금독 밑에 두기도 했다. 피아노와 기타 등 악기를 이용했다는 사람도 있다.

그래봤자 쌈짓돈 얘기다. 거액이면 이런 식으론 어림도 없다. 그 많은 5만원권이 다 어디 갔나 했더니 마늘밭에 묻혀 있었다는 것만 봐도 그렇다. 이모씨 형제가 불법도박사이트 운영으로 챙긴 돈 110억7800만원 중 99억6000만원이 마늘밭에서 나왔다는 데엔 기가 막힐 따름이다.

지난 3월2일 현재 5만원권 유통 잔액은 20조1076억원으로 시중에 풀린 돈 42조6269억원의 47.2%요,1만원권 유통잔액 20조761억원을 초과했다는 마당이다. 이렇게 많이 발행됐는데도 보통 사람들은 여전히 구경하기 힘든 판이다. 당분간 마늘밭 몰래 파헤치기가 유행할지도 모르게 생겼다.

박성희 수석논설위원 psh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