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학교는 병원과 의료산업 경영인들을 위한 단기과정을 10년째 운영해 오고 있다. 그런데 올해부터는 '보건의료정책' 분야 강의를 아예 빼버렸다. 경영에 별 도움이 되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강의를 듣고 있으면 분통이 터져 정신건강에 별로 좋지 않기 때문이다.

병원계는 요즘 건강보험 재정 적자가 1조3000억 원을 돌파했다며 보건복지부에서 고통분담 차원으로 내 놓은 '트리플 악재'로 벌집 쑤셔 놓은 듯하다. 영상장비 보험 수가 인하와 감기를 비롯한 경증 질환 환자가 종합전문요양기관(3차병원)을 방문하면 본인 부담금을 더 받겠다는 것,그리고 지속적으로 문제가 되어 온 임의비 급여를 불법으로 간주한다는 원칙들이 바로 그런 악재들이다.

병원들은 이 악재를 헤쳐 나가기 위해 회의를 거듭하고 시뮬레이션을 해 보며 전전긍긍하고 있다. 영상장비 수가 인하와 관련해서는 당장 다음달부터 자기공명영상(MRI)은 무려 30%,컴퓨터단층촬영(CT)과 양전자단층촬영(PET)은 15%,16%를 무 자르듯 깎겠다고 일방적으로 통보됐다.

며칠 전 병원협회 임원진이 보건복지부 차관을 만나 너무 많이 자르면 우린 어떻게 살란 말이냐며 사정해 봤지만 "지금 건강보험 적자가 얼만데 무슨 한가한 소리냐"고 정중히(?) 거절당했다. 수가가 깎여 마진이 적어져 '박리(薄利)'가 되면 그 다음에 붙을 단어가 '다매(多賣)'라는 것은 초등학생들도 다 아는 사자성어이다.

벌써부터 모 대학병원에서는 인센티브를 줄 테니 MRI,CT 건수를 두 배로 늘리라는 지시가 의사들한테 내려갔다고 한다.

그렇지 않아도 과잉진단이니,중복촬영이니 말들이 많은데 이젠 환자 부담도 덜어졌으니 영상진단으로 나가는 보험 지출은 오히려 늘어날 수 있다. 경증환자 문제만 봐도 그렇다. 본인부담금 더 내고 종합병원 진료를 받을 수 있는 환자들은 계속 가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만 동네의원으로 발길을 돌리게 될 게 뻔하다. 결국 질병이 중하냐 가벼우냐가 아니라 부담능력에 따라 종합병원을 갈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 결정된다.

2003년과 2004년 인제대에서 5차에 걸쳐 의료 통제 개선을 위한 '자유의료 포럼'을 개최했었다. '시장경제를 지향하는 의료서비스 시스템 구축'이라는 대명제를 달고 시작한 이 포럼에서 '의료시장 개방의 필요성'이라는 제목으로 당시 박병원 재정경제부 차관보가 기조연설을 한 적이 있다. 그때 지정 토론자로 나와서 복지의료를 주장하며 독설을 퍼부은 보건복지부 젊은 과장이 있었다.

그는 사회복지를 전공한 복지통이었는데,이명박 정부 초기에 청와대에 들어가 시장경제 의료 정책의 기반을 만들고 이를 알리는 강의를 다니는 것을 보며 정말 황당했다. 공무원을 보고 '영혼이 없는 정책제조기'라더니 나로서는 도저히 상상하기 어려운 일을 하고 있는 걸 보면서 참 씁쓸했다.

책임지지 않는 잘못된 정책이 쓰나미처럼 몰려오고 있다. 이번 일본 쓰나미에서 15m가 넘는 제방을 쌓아 이를 막아낸 작은 마을 이야기가 화제다.

그 마을의 촌장은 1980년대 15m 쓰나미가 온 적이 있기 때문에 제방이 적어도 그 이상은 되어야 한다는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켜 마을을 살렸다. 우리 의료계의 제방은 경쟁력을 높이는 길밖에 없다.

그동안 잘해왔던 부분의 장점을 더욱 살리고 효율성을 높이는 일을 지속적으로 해나가는 것도 그 중 하나다. 금방 왔다 사라지는 쓰나미처럼 정책은 곧 바뀐다는 사실을 직시하고,의료기관의 미션과 비전을 확립해 그 방향으로 일관성 있게 전진하는 것만이 해결책이다. 잘못된 정책이 나오지 않는 편이 좋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것 같다.

백수경 < 인제대학원대 학장 / 객원논설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