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신문이 '스트롱 코리아:과학기술 인재 10만명 키우자'를 내걸고 연중기획을 시작한 이 시점에 과학기술 인재 양성의 요람 하나가 사고를 쳤다. 언론의 지지 속에 개혁을 진행한다던 KAIST가 이제는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있다. 이 비극에도 불구하고,한국의 과학기술 인재 양성은 절실하다. 미래사회가 과학기술자를 더 많이 필요로 할 것이 분명하고,그 경쟁에서 앞서는 나라가 세계를 주도하게 될 것도 불문가지니 어쩌겠는가.

19세기 초 유럽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은 사업가와 기술자들이 부(富)를 축적하는 길을 열었지만,과학은 아직 산업과는 관련 없는 신지식의 놀이터였다. 과학기술 인력을 숫자로 따져볼 필요도 없는 채 현대사회는 시작됐다. 과학 지식이 적극적으로 산업기술에 활용되기 시작한 것은 불과 1세기 남짓 전의 일이다.

역사상 따로 놀던 '과학'과 '기술'이 19세기 말에는 '과학기술'로 연결되며 그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바로 그 즈음 일본은 동아시아에서는 가장 먼저 서양의 '과학기술'을 배워 들여 앞서게 되었다.

실제로 국가 간의 경쟁에서 과학기술이 중요해진 것은 20세기 들어와서의 일이었다.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세계의 과학기술 수준은 아직 미약했다. 대학이 많지 않았고,과학기술자도 적었다. 게다가 식민지 시대를 경험한 한국의 경우 과학기술자라고 부를 만한 고급 인력은 거의 양성되지 못했다. 《한국 과학기술자의 형성 연구》(과학재단,1995)를 보면,1945년까지 일본 대학 이공계를 졸업한 한국인은 모두 204명뿐이었다. 당시 생물학,의약학,농학 분야는 조사하지 못했고,지금까지 숙제로 남아 있다.

해방 전후 이들 204명의 일부는 귀국했지만 상당수는 일본에 그대로 남았다. 미국에서 공부한 한국 청년도 200명가량이었으나 귀국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어쨌거나 이렇게 귀국한 과학기술자는 남과 북으로 갈라섰다. 1948년 남과 북에 정부가 들어섰을 때 서울과 평양의 과학기술자는 각각 수십명뿐이었다.

수십명의 과학기술자뿐인 1948년의 대한민국은 차마 '현대'국가라 부르기도 민망할 지경이었다. 한국의 과학기술자 인력에 획기적 변화가 일어난 것은 한국전쟁(1950~1953)과 월남참전(1964~1966,한국군 철수 완료는 1973년) 이후였다. 전쟁 때 병역을 피해 도미했던 젊은이들 일부가 이공계 교육을 받았다.

또 1950년대 후반에는 미국의 '평화를 위한 원자력' 덕택에 수백명이 선진국에 건너가 과학기술자로 성장했다. 1966년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가 세워지자 그들 일부가 귀국했다. 해방 당시 수십명이던 과학기술자는 20여년 만에 1000명을 넘었고,그 숫자는 폭발적으로 증가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세계적 수준의 과학기술자를 포함한 한국 과학기술 인력이야말로 선진국으로 발돋움하고 있는 이 나라의 힘이다. 그리고 미래를 위해 그 숫자는 10만명,20만명으로 더욱 많아져야 한다.

KAIST의 급격한 개혁은 두 가지 큰 잘못을 범한 것 같다. 첫째는 성적이 떨어지는 학생들에게 등록금을 부과한 일이다. 8명 가운데 1명은 '장짤(장학금 짤리기)' 당했다니 이 나라 정서에서 그 스트레스란 말도 못할 지경이었을 것이다. 또 하나 큰 잘못은 모든 과목을 영어로 가르치려 한 일이다.

원래 KAIST는 1966년의 KIST가 이공계 대학원(KAIS,1971)을 거쳐,1984년 학부 대학이 되면서 대학원생을 위한 '전액 장학금'이 그대로 학부생에게 확대된 원죄(原罪)가 있었다. 앞으로는 장학금을 성적에 따라 차등지급하는 제도를 새로 만들어갈 일이다. 영어공용 역시 시간을 두고 선택적으로 추진될 일이지 한꺼번에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성급한 개혁은 개악이 되기 쉽다. 서두르지 말고 과학기술의 교육을 개선해 간다면,우리가 10만명이 넘는 과학기술자를 가진 강국이 되는 날은 그리 머지않을 것이다.

박성래 < 한국외대 과학사 명예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