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금융계의 '살아 있는 전설'로 불리는 에밀리오 보틴 산탄데르 금융그룹 회장(76).그가 13일 한국을 처음으로 찾았다. 소매금융에서 유럽 최대,세계 6위를 자랑하는 글로벌은행의 최고경영자(CEO)가 한국을 방문한 것은 국내 금융계 인사를 만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전용기로 전날 밤 늦게 김포공항에 내린 보틴 회장은 이날 아침 서울 양재동의 현대 · 기아자동차 본사로 향했다. 붉은색(산탄데르 로고 색상) 넥타이 차림의 보틴 회장이 7시50분께 에쿠스 리무진에서 내리자 붉은색 넥타이를 맨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이 그를 맞았다.

정 회장은 활짝 웃으며 꽃다발을 전했다. 보틴 회장은 장시간 비행에도 불구하고 피곤한 기색 없이 "반갑습니다"며 정 회장의 손을 잡았다. 둘은 사진촬영 포즈를 잡은 뒤 곧바로 접견실로 이동했다. 1시간가량 현대차그룹과 산탄데르의 협력에 대해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참석자들은 "시종일관 좋은 분위기였다"고 전했다.

◆보틴 회장, 정몽구 회장 4시간 만나

정 회장과 보틴 회장은 영국에 합작금융사를 설립하고 브라질 시장에서 협력하는 방안을 구체적으로 논의했다. 정태영 현대캐피탈 사장도 자리를 함께했다. 현대차 계열인 현대캐피탈은 2009년 10월 산탄데르와 손잡고 '현대캐피탈 독일' 합작법인을 세웠다. 현대차 관계자는 "독일에서 기아차 고객 가운데 현대캐피탈의 할부금융 서비스를 이용한 비율이 46%에 이를 정도로 큰 성과를 내고 있다"고 말했다.

보틴 회장이 현대차를 방문한 것은 파트너십을 더욱 강화하기 위한 '점검'차원인 것으로 알려졌다. 현대차가 지난 5~10년 동안 혼다 닛산 크라이슬러 등을 제치고 글로벌 '빅5'로 부상할 수 있었던 저력의 원천을 눈으로 보고 확인하기 위한 것이란 얘기다. 보틴 회장은 사업협력을 논의한 뒤 가벼운 발걸음으로 정 회장과 함께 헬기를 타고 경기도 남양 현대 · 기아차 연구소로 향했다. 연구소를 이곳저곳 둘러보고 '쏘나타 하이브리드'와 전기차 '블루온' 등 미래 친환경차를 시승했다. 그는 헬기로 김포공항으로 이동,낮 12시께 스페인으로 떠났다.

보틴 회장이 짧은 방한 일정에도 불구하고 경기도의 남양연구소를 찾은 것은 정 회장이 권유한 데 따른 것으로 알려졌다. 정 회장이 현대차의 기술과 품질에 대한 자신감이 그만큼 강하다는 것이다.

유럽 최대 소매은행인 산탄데르가 현대차와의 협력에 고삐를 죄는 것은 현대차의 향후 전망을 그 만큼 밝게 보고 있다는 방증으로 업계는 분석하고 있다.

◆車-금융 동맹으로 유럽 · 남미시장 확대

현대차가 영국과 브라질에서 산탄데르와 자동차금융에 공동 진출키로 한 것은 마켓셰어를 늘리기 위해서다. 현대차는 기술력과 품질에서 유럽 메이커에 비해 뒤지지 않지만, 낮은 브랜드 인지도에 발목이 잡혀 있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 유럽의 최대금융회사와 손잡고 마케팅을 더 강화하겠다는 전략이다. 한국은 신차 구매자의 25%가 할부금융을 이용하지만 미국이나 서유럽은 그 비율이 60%를 넘는다. 최대식 하이투자증권 연구위원은 "미국의 자동차 수요는 할부 금리에 영향을 받을 정도로 자동차 금융이 마케팅에서 중요하다"며 "현대차가 영국과 브라질에서 자동차 금융에 공을 들이는 것은 시장점유율을 끌어 올리기 위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현대차는 2012년 11월 연산 15만대의 브라질 공장을 준공한다. 브라질은 세계 4대 시장이며 성장잠재력은 중국과 맞먹는다. 현대차는 지난해 브라질에서 35%를 관세로 물고도 10만6000대를 수출,판매했다. 폭스바겐 피아트 GM 포드 등에는 밀리지만 내년 말 공장이 가동되면 브라질,나아가 남미에서도 한판승부가 가능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브라질은 아르헨티나 파라과이 우루과이 등과 함께 '남미공동시장(MERCOSUR)'으로 엮여 있다. 브라질에서 생산한 자동차를 관세없이 역내 국가에 팔 수 있다는 것이다.

정 회장과 보틴 회장은 브라질과 남미 시장에 대해 많은 대화를 주고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정 회장은 "자동차 할부금융에 탁월한 능력을 보유한 산탄데르 은행과 전략적 제휴 관계가 강화되고 있는 것에 대해 기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에 보틴 회장은 "급성장하고 있는 현대 · 기아차와 좋은 관계가 계속 유지되길 바란다"고 답했다.

장진모 기자 j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