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법정관리(기업회생절차)에 들어간 해운업체 A사의 법정관리인은 종전 대표가 그대로 맡고 있다. 경영 실패에 따른 책임을 져야 한다는 지적이 나왔지만 "회사에 대한 이해도가 높다"는 이유로 법원이 그렇게 결정했다. 이 회사는 회생 채무의 68%에 대해 출자전환하고 32%만 변제하는 채무 재조정을 추진 중이다. 변제할 채무는 최장 2019년까지 나눠 갚으면 된다.

삼부토건의 법정관리 신청을 계기로 채권단이 볼멘 소리를 내고 있다. 부실 기업들이 '경영권을 보장받을 수 있는 법정관리'를 너무도 쉽게 선택한다는 이유다. 삼부토건의 경우 서울 르네상스호텔과 경주 콩코드호텔 등 전국에 부동산 자산을 많이 갖고 있다. 추가 담보를 제공하라는 채권단의 제의를 뿌리치고 법정관리를 택했다는 것이 은행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은행과 기업 간 갈등 본격화하나

법정관리를 신청한 기업들은 '마지막 선택'이었다고 강조한다. 만기가 다가온 채무를 갚지 못하는 상황에서 부도를 막기 위해선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삼부토건 관계자는 "지난 12일 채권단 협의 과정에서 막판에 담보를 추가로 제공할 수 있다는 의사까지 표현했지만 채권단 내부에서조차 의견이 엇갈렸다"고 말했다.

채권은행들은 기업이 사전 협의도 하지 않고 법정관리를 신청한 데 대해 격앙된 분위기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거래 기업과 오랫동안 협력관계를 유지하면서 재무컨설팅까지 도맡았는데 아무 얘기도 없이 법정관리를 신청한 것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라고 전했다.

기업이 법정관리를 신청하면 모든 채권 · 채무가 즉각 동결돼 은행들은 원금 손실까지 감수해야 한다. 담보를 충분히 확보하고 있더라도 충당금을 별도로 쌓아야 한다. 은행 재무구조에 악영향을 끼치는 구조라는 얘기다.

은행 관계자는 "앞으로 대기업이 출자한 계열사라 하더라도 대출을 끌어쓰기는 어려워질 것"이라며 "오는 6월까지 각 기업에 대한 신용평가를 갱신하면서 이런 엄격한 관리기준을 도입하겠다"고 말했다.

◆법정관리 들어가도 경영권 유지

기업들이 쉽게 법정관리행을 선택하는 배경 중 하나는 '경영권 보장'이다. 정부는 2006년 통합도산법(채무자 회생 및 파산에 관한 법률)을 개정하면서 기존 관리인 유지제도(DIP · debtor in possesson)를 도입,종전 대주주의 경영권을 보장해주고 있다. 기존 경영자가 공금 횡령 등 위법사항이 없는 한 경영을 계속 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서울중앙지법 파산부 관계자는 "기존 경영자가 기업 속사정을 가장 많이 알고 있어 회생절차를 밟을 때 도움이 된다"고 설명했다.

관련법에도 명시돼 있다. 도산법 제74조(관리인의 선임)는 법원이 채무자의 대표를 관리인으로 선임해야 한다고 적시하고 있다.

은행 측은 이런 제도가 법정관리를 신청한 기업들의 모럴해저드를 조장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경영 실패에 대한 책임을 지우기보다 대주주의 경영권 보장에 더 초점을 맞췄다는 것이다.

여기에다 서울중앙지법은 기업회생 절차를 6개월 내 마무리할 수 있는 '패스트트랙' 제도를 최근 도입했다. 부실기업이 법정관리를 통해 채무를 일정 부분 탕감받고 최단 기간 내에 경영권을 되찾을 수 있는 길을 열어놓은 셈이다. 법원의 재량권이 지나치게 많다는 점도 논란거리다. 선모 광주지법 파산부 판사는 최근 친형을 법정관리 중인 기업 2곳에,친구 변호사를 3곳에 각각 감사로 임명했다.

◆법정관리 신청 기업 갈수록 늘어

법정관리를 선택하는 기업은 급증하는 추세다. 서울중앙지법에 따르면 법정관리를 신청한 기업이 2007년 29곳에 불과했지만 2008년 110곳,2009년 193곳,작년 155곳 등으로 늘었다.

올 들어선 1분기까지 대한해운(1월) 월드건설(2월) 알티전자(3월) LIG건설(3월) 등이 법정관리를 신청했고,이달 들어서도 남영건설 한라주택 삼부토건 등이 법원을 찾았다. 올해 법정관리를 신청한 기업은 총 45곳으로,작년 같은 기간(32곳)보다 40% 이상 늘어났다.

조재길/심성미 기자 road@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