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권 만기연장 기피…건설업계 "속수무책"
"수도권 택지 개발을 위해 2금융권에서 받은 1000억원대 프로젝트 파이낸싱(PF) 대출을 지난 1월 연장했는데,다음달이면 또 만기네요. 이번엔 추가 담보도 마땅치 않아 상황이 바뀌지 않는다면 두손을 들어야 할 판입니다. "(중견 건설사 대표)
건설면허 1호 업체로 토목 중심으로 사업을 벌여온 삼부토건이 PF 대출에 발목을 잡혀 법정관리를 신청하자 건설업계가 패닉 상태에 빠져들고 있다. PF 대상 개발사업은 아파트 분양 등이 이뤄져야 유동성 확보가 가능해 주택 시장 침체가 지속되는 상황에서는 속수무책이라는 지적이다.
◆빚 내서 이자 막는 악순환
건설업계는 PF 대출이 갈수록 강력해지는 시한폭탄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작년 말 현재 금융권 전체 PF 대출은 38조7000억원이다. 저축은행이 369곳 개발사업장에 빌려준 규모는 12조4000여억원에 이른다. 평균 연체율은 24.3%까지 치솟았다.
은행들의 대출 회수 압박 강도도 높아지고 있다. W건설 관계자는 "작년부터 미뤄온 분양 현장을 담보로 추가 대출을 받으려는데 거래은행이 반대해 견본주택도 못 짓고 있다"며 "봄철 분양 성수기를 놓칠 것 같아 정말 불안하다"고 털어놨다.
PF 대출은 건설사들의 재무제표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이런 이유로 겉보기에 멀쩡한 회사들도 갑자기 무너지는 사례가 나온다. 삼부토건은 작년 매출 8374억원에 영업이익 201억원을 거둔 흑자기업이다. 부채비율도 200% 정도로 양호했다. 하지만 카자흐스탄 오피스,내곡동 헌인마을,사천 골프장 개발사업으로 8000억원대의 보이지 않는 PF 대출을 안고 있다. 작년 매출 규모다. 이런 상황에서 만기가 돌아온 '헌인마을 PF 대출'을 막지 못해 백기를 들었다.
◆"제2 삼부토건 많다"
문제는 건설업계에 '제2 삼부토건'이 즐비하다는 점이다. T건설의 한 임원은 "매달 수천만원의 PF 대출 이자를 카드 돌려막기 하듯 갚아가는 속병 든 건설사들이 많다"며 "금융권이 PF 만기 연장에 더욱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고 있어 추가 담보가 없는 업체들은 피해가기 쉽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건설업계는 현재 진행 중인 금융권의 건설사 신용위험등급 평가에도 주목하고 있다. 낮은 등급을 받으면 PF 대출 회수 압박이 강해지면서 결국 두손을 들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주택 및 부동산 시장 침체로 금융권이 PF 대출에 나서지 않아 어려움을 겪는 사업장과 건설사는 한둘이 아니다. 판교 알파돔시티,양재동 파이시티 등 초대형 개발 프로젝트를 비롯해 건설사들이 대출을 받지 못해 공사를 중단한 현장이 200여곳을 넘는다는 게 한국주택협회의 설명이다.
◆'중견 업체 60% 몰락' 괴담도
건설업계를 불안하게 만드는 요인은 급감하는 일감이다. 공사가 있어야 유동성을 확보해 대출금을 갚으면서 정상적인 경영이 가능하지만 상황은 악화일로다. 대한건설협회에 따르면 지난 2월 국내 건설공사 수주액은 5조955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17.2% 감소했다. 올해 1~2월 두 달간 수주액도 작년 같은 기간보다 19.2% 줄었다.
건설산업정보센터와 한국건설산업연구원에 따르면 작년 3분기 종합건설사 1만2156개사 가운데 '공사 무실적'이 68%에 달했다. 이어 4분기와 올해 1분기에는 전체의 70% 이상이 단 1건의 공사도 따내지 못한 것으로 집계됐다.
일감 부족으로 인한 부도 공포는 확산되고 있다. H건설 관계자는 "워크아웃이나 법정관리에 들어가지 않은 업체들의 절반 이상은 삼부토건 같은 상황일 것"이라며 "100위권 건설사 가운데 현재 좌초된 곳이 28개사인데 연말까지 쓰러질 업체가 60개에 이를 것이라는 '6 대 4 괴담'까지 떠돌고 있다"고 말했다.
이홍일 한국건설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올해 국내 공공 발주 물량이 100조원 밑으로 떨어질 가능성이 크고,중동 사태 등으로 해외 수주도 작년보다 30조원 정도 감소한 150조원 안팎에 그칠 전망"이라며 "일감 부족에서 비롯되는 중견 건설사들의 연쇄 부도를 막기 위한 정부 대책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박영신 기자 yspar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