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즐거움 가운데 가르치는 일이 손꼽힌다. 그러나 대학강단에서 40여 년의 세월을 보냈던 필자에게 즐거움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가슴 아픈 기억 가운데 하나는 입학 첫 학기 후 성적불량으로 학생을 퇴학 조치해야 하는 어느 초여름 날이었다. 문제 학생 어머니가 찾아와 호소했다. 아버지는 실직 중이고 어머니 당신은 몇 개월 선고 받은 암환자라며 케모테라피로 듬성듬성해진 머리를 내밀며 눈물을 보였으나 평점이 너무 낮아 규정대로 조치해야만 했다.

최종학기 성적불량으로 상당수의 학생들에게 졸업을 유예 조치시킨 것도 교육자로서 불가피한 일이었다. 뜨겁게 차게 담금질을 거듭해 쇠를 강하게 만드는 대장간처럼 교육기관도 학생 단련하기에 엄함과 부드러움을 적절히 배합한다.

한국 교육에 대한 평가는 국내외에서 판이하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한국의 교육을 칭찬했고,며칠 전 영국신문 파이낸셜 타임스(FT) 칼럼도 영국이 한국 교육을 본받아야 국제경쟁력을 기를 수 있다고 역설했다. 반면 국내 평가는 부정적이다. 국내 교육이 못 미더워 조기유학의 길로 어린 자녀를 내몰고 있다. 엇갈리는 평가를 헤아려 보면 중고등학교 수준까지는 한국 교육이 수준급이지만 대학,특히 대학원 수준에서 세계 일류 수준에 크게 미흡하다.

반면 오바마의 엄살은 우수한 대학예비학교들을 제외한 일반학교에 대한 언급이고,세계 대학평가에서 최상위권은 미국이 거의 독식하고 있다. 결국 국내 교육의 문제는 대학교육의 질을 높이는 학문의 수월성 제고에 귀착한다. 1960년대 중반 구태의연한 국내 대학사회에 경각심을 일깨우려 설립한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KAIST)이 새로운 바람을 불고 왔다.

그간 자체의 연구 및 교육 성과는 물론 기존 대학들을 부추긴 경쟁 유도에 있어서도 성공적이었다. 요즘 여론의 화살이 KAIST를 표적으로 삼고 있고,서남표 총장이 사퇴압력을 받고 있다. 그의 죄목이 세계 1위 대학을 만들겠다는 야심이란다. 엊그제 청문회에서 지구상 가장 비효율적인 국회가 서 총장을 상대로 언어의 폭력을 휘두르며 희롱했다.

문제의 발단은 최근 잇단 학생 자살이었다. 불행한 일이다. 대학 분위기에 조금은 부드러운 변화가 필요해 보인다. 그러나 수월성을 추구하는 서 총장의 교육궤도에 근본적 수정이나 역주행을 요구해선 안 된다. 제기된 불만사항 중 들을 것과 듣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예컨대 1학년 학사경고 면제 요구가 있는데,글머리에서 언급했듯이 필자가 재직하던 대학에서는 이미 오래 전 입학 후 첫 학기에 학사경고는 물론 제적도 불사했다. F학점에도 수업료 면제조치 역시 납득하기 어렵다.

성적 얘기가 나왔으니 말이지,학점 인플레이션이 대학의 실적저하를 가져오고 있다.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에는 선풍기 앞에 시험지 날려 채점한다는 농담이 나돌 만큼 평점에 태만한 교수들이 있었다. 요즘에는 채점에 꼼꼼하고 평가한 시험지를 되돌려 읽히는 교수들도 대다수다. 예전에는 절대평가라서 교수의 재량이 넓었으나 요즘에는 학점등급 배분이 일률적으로 정해진 상대평가가 대세다. 그러다 보니 예전보다 평점이 1 내지 1.5포인트 억지 상향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퇴직 후 마주치는 제자들 눈길에서 간혹 학점 짠돌이에 대한 원망이 서려있음이 읽히지만 고마움의 정을 더 많이 느낀다. 학점 따는 재주는 인간의 다양한 재능의 한 측면에 불과하다. 낙제생이 추후 성공한 사례는 아인슈타인 말고도 부지기수이고 우등생이 전수 받은 교육의 볼모로 일생을 마감하기도 한다.

세계 일류대학이 나와야 한다. 서 총장이 이끄는 KAIST 교육개혁은 계속되어야 한다.

김병주 < 서강대 경제학 명예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