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들이 대기업 계열사 중 한 곳이 채권단과 협의 없이 법정관리를 신청하면 공동으로 다른 계열사의 신용등급을 떨어뜨리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일부 기업들의 도덕적 해이를 더 이상 방치하지 않겠다는 의미다. 은행들은 당장 이달부터 이 같은 조치를 시행하는 쪽으로 의견을 모으고 있다.

◆등급 낮추면 금리 부담 높아져

은행들은 기업의 재무 상태와 담보 여력,영업력 등을 종합 평가해 신용등급을 A(정상) B(일시 유동성 부족) C(워크아웃) D(법정관리) 등 4단계로 구분하고 있다. 은행별로 또다시 세부 등급을 나누는 식이다. 예컨대 국민은행은 A등급 4개,B등급 9개,C등급 3개,D등급 1개 등 17개 단계로 구분한다. 신한은행은 20개 단계다.

상위 등급으로 올라갈수록 우량한 기업이란 의미여서 대출금리를 낮게 적용한다. 다만 담보 여부에 따라 실제 적용 금리는 제각각이다. 기업이 법정관리를 신청하면 평소 신용등급과 관계없이 곧바로 D등급으로 떨어뜨리는 구조다.

은행들이 법정관리를 신청한 기업의 다른 계열사에 대해 신용등급을 강등시키는 방안을 추진하는 것은 LIG건설과 삼부토건 사태에 대한 충격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은행들은 LIG건설이 사실상 LIG 계열이란 점 때문에,삼부토건의 경우 부동산 자산이 많은 우량 기업이라는 점 때문에 신용위험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했다며 자성하고 있다.

은행 관계자는 "지금도 법정관리와 같은 특수 상황이 발생했을 때 다른 계열사나 차주의 신용위험을 재평가할 수 있다"며 "하지만 은행 간 경쟁이 치열하기 때문에 공동 대처하지 않으면 실효를 거두기 어렵다"고 전했다.

시중은행들은 우량 기업이라도 신용등급이 한 단계 떨어지면 대출금리를 추가로 0.5%포인트가량 더 부담해야 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연간 1조원 안팎의 은행 여신을 사용하고 있는 대기업 계열사라면 매년 50억원을 추가로 내야 하는 것이다.

◆일부에선 "담합 가능성"도 지적

은행권의 이 같은 움직임에 대해 일부에서는 시대 조류에 역행하는 조치라는 지적도 내놓고 있다. 한 은행 임원은 "현재 신용등급을 개별 기업 중심으로 하고 있는데 전체 그룹에 신용등급 불이익을 준다는 것은 예전처럼 그룹 단위로 신용등급을 준다는 것과 같은 의미"라고 지적했다. 공정거래위원회의 한 관계자는 "은행이 공동 제재에 나서는 것은 담합에 해당할 수 있는 만큼 추이를 주시하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금융당국은 은행권의 공동 대응 움직임에 긍정적인 입장이다. 대기업에 대해 연대 책임을 묻지 않을 경우 금융권 부실이 심화할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당국 관계자는 "은행과 기업 간 신뢰가 깨진 상황에서 은행들이 그런 조치를 논의할 수 있다고 본다"며 "단순히 은행의 보복으로 볼 문제가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은행들이 리스크 관리를 강화하는 차원에서 신용등급 강등과 같은 방식을 공동 강구하는 것은 담합과는 거리가 있다"며 "다만 금융감독원 등이 이에 관한 지침을 내려주거나 하는 조치는 필요하지 않다"고 했다.

◆"6월까지 신용위험평가 확 바꾼다"

은행 여신담당 임원들은 최근 잇따라 회동을 갖고 현재 진행 중인 기업 신용위험평가를 깐깐한 방향으로 수정한다는 데 합의했다. 공동 신용등급 강등 조치의 경우 곧바로 시행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게 은행들의 얘기다.
은행들은 이달 말까지 금융권 신용공여액 500억원 이상 대기업 2000여곳에서 2010년 기준 확정 재무제표를 제출받아 일제히 정기 신용위험평가에 들어간다. 금융권 총 신용공여액의 0.1% 이상을 차지하는 주채무계열을 대상으로 한 재무구조 평가도 최근 시작했다.

은행 관계자는 "계열사 중 일부가 망가지면 미련없이 버렸다가 나중에 법정관리를 통해 살아나면 다시 거둬들이려는 기업이 적지 않다"며 "이 과정에서 은행 건전성이 악화할 경우 다른 기업이나 개인 고객에게까지 피해를 줄 수 있는 만큼 신용평가를 엄격하게 진행할 것"이라고 전했다.

박준동/조재길/류시훈 기자 jdpow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