흡연 은폐 수칙
장갑 없을 땐 젓가락도 이용…'식후연초'보다 '식전연초'
양치 후엔 세수도 필수…커피와 담배는 '상극'
정보기술(IT) 분야의 대기업에 근무하는 강모 대리(32)는 요새 점심을 먹은 후엔 항상 담배를 두세 개비 연달아 피운다. 강 대리가 다니는 회사는 얼마 전부터 사업장 내 흡연지역을 모두 없앴다. 간접 흡연의 피해와 함께 직원들이 흡연 때문에 자리를 자주 비워 업무 효율이 떨어진다는 이유에서다.
이 때문에 담배를 피우기 위해선 회사 밖으로 나가야만 한다. 그가 일하는 건물에서 회사 입구까진 걸어서 10분이나 걸린다. 왕복 시간을 감안하면 담배 한 개비를 피우기 위해 20분 이상을 투자해야 한다. 게다가 회사 밖으로 나가려면 출입증을 찍어야 한다. 자칫 일 안하고 '땡땡이' 치는 직원으로 낙인 찍히기 십상이다. 그는 "회사 방침을 거부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즐기는 담배를 끊고 싶지도 않다"며 "점심 시간 때 몸이 원하는 니코틴양을 최대한 축적해 놓을 수밖에 없다"고 푸념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
요즘 기업의 금연 운동은 대세로 자리잡았다. 건물 안팎의 흡연장을 없애는 수준을 넘어 직원들에게 인사 고과를 무기 삼아 금연을 강요하는 수준까지 달했다. 신입사원들에게 금연 서약서를 받거나 전 직원으로 하여금 금연교육을 받게 하는 기업들의 얘기는 더 이상 화젯거리 축에도 끼지 못한다.
'금연 도전' 프로그램을 만든 뒤 이에 신청한 직원들을 보건소에 데리고 가 상담을 시켜주고 침도 놓아준다. 금연에 성공하면 상품권을 준다. 이 정도면 양반이다. 한 대형 건설업체는 금연 선포에서 한발 더 나아가 금연 유무를 승진점수에 반영한다. 담배를 피우는 직원은 인사고과에서 C등급 이하를 주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사장이 금연을 강조하다 보니 임원들도 어쩔 수 없이 담배를 끊게 되고,직원들도 연이어 금연하게 되는 연쇄 작용이 일어난다.
그러나 담배를 사랑하는 '김과장 이대리'들은 여전히 존재한다. 언제나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는 법.회사의 감시를 피하면서 담배를 피우는 '금연 레지스탕스'들의 모습도 천태만상이다.
◆금연 레지스탕스들의 행동 수칙
유통업체 직원 이 대리의 금연 레지스탕스 활동은 주도면밀하다. 그가 회사에서 담배를 피우는 타이밍은 금연 파수꾼인 팀장이 최소 1시간 이상의 회의에 들어가거나,외출할 때다. 흡연 시 커피는 절대 마시지 않는다. 커피의 짙은 향과 자극적인 담배 냄새가 섞이면 오히려 냄새가 오래 남는 '마이너스 시너지'효과가 발생할 수 있어서다. 흡연의 흔적을 감추기 위해선 '식후연초'보다는 '식전연초'가 더 좋다. 밥과 반찬이 식도와 입안에 쌓인 담배냄새를 중화시켜주고,음식냄새가 담배냄새도 '엄폐'해준다.
자타가 공인하는 애연가인 무역회사 직원 오 과장의 사연은 눈물겨울 정도다. 담배를 피우러 나갈 때면 직원 캐비닛에서 여벌의 외투를 꺼낸다. 냄새를 막아주는 일종의 갑옷이다. 겨울에는 머리에 냄새가 배는 걸 막기 위해 비니(두건 스타일의 모자)를 쓰고,오른손에는 가죽장갑을 낀다. 바람은 항상 등진다. 그래야 몸에 닿는 연기의 양을 최소화할 수 있다. 흡연 뒤 양치질할 때는 세수도 하고,꼭 로션을 바른다. 대신 로션은 향이 짙으면 오히려 의심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순한 걸 쓴다.
그런 그에게 얼마 전 대학 후배가 찾아와 엉겁결에 아무런 준비물 없이 흡연할 상황에 처했다. 오 과장은 인근 편의점에 들어가 생수를 구입하고 나무젓가락을 얻어 장갑대용으로 끼워 피웠다. 모자 대용으로는 비닐봉투를 뒤집어 썼다. 흡연을 마치고 생수로 입을 헹구는데 후배가 건넨 말."형,그냥 담배 끊어요…." 팀장의 따가운 눈총보다 후배의 한 마디가 자신을 더 초라하게 만들자,오 과장은 현재 금연을 시도 중이다.
◆물고 물리는 숨바꼭질
감시를 교묘하게 피해 다니는 김과장 이대리들이 있다는 걸 회사가 모를 리 없다. 금연령을 내린 일부 기업들은 담배 피우는 직원들을 걸러내기 위해 정기검진 때 니코틴 검사나 소변 검사를 실시한다. 그러다 보니 흡연 사실을 들키지 않기 위해 소변 바꿔치기를 하는 웃지 못할 상황도 벌어진다.
한 대형 철강업체에 다니는 조모 대리는 소변 바꿔치기를 했다가 낭패를 당한 경험이 있다. 그가 다니는 회사는 직원들에게 금연을 강요하지는 않지만 금연을 약속한 직원이 이를 어겼을 경우엔 최소 30만원의 벌금을 내야 한다. 흡연 여부는 건강검진 때 소변 검사로 판가름난다. 결국 궁리 끝에 비흡연자인 아내의 소변으로 대신 냈는데 양성판정을 받았다. 아내가 근무하는 회사 부서의 흡연율이 높아 간접흡연에 노출된 탓이다.
그래서 이번엔 담배를 안 피우는 입사 동기 소변을 제출했는데 또다시 양성 판정을 받았다. 전날 술자리에서 동기만 빼고 다들 담배를 피워대서….조 대리는 이제 구차하게 남의 소변을 빌리지 않고,담배를 끊고 정정당당하게 테스트를 통과했다.
이 같은 회사의 금연 정책에 대해 흡연자들의 생각은 어떨까. 한 전자업체 마케팅팀에서 근무하는 문모 대리(33)는 "직원들의 건강을 생각하는 회사의 금연 방침에는 공감한다"며 "그러나 인사고과까지 들먹이며 금연을 강요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를 지나치게 침해하는 일"이라고 항변한다.
같은 회사 동료인 김모 대리(33)도 "내가 스스로 돈 주고 피우고,세금도 많이 내는데 왜 이리 죄인 취급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푸념했다.
그러나 실내뿐 아니라 실외 공공장소에서도 금연장소가 늘어나는 등 흡연자들이 설 자리는 점점 좁아지고 있다. 게다가 담뱃값 인상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소문에 늘 조마조마하는 흡연자 김과장 이대리들은 요즘 이래저래 힘든 시절을 겪고 있다.
강경민/노경목/조재희/강유현 기자 kkm1026@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