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실한 불교 신자인 최은영 한진해운 회장은 이달 초 서울의 한 절을 찾았다. 남편인 조수호 전 회장의 명복과 한진해운이 운항하는 200여척 선박의 안전을 빌기 위해서다. 소말리아 해적의 공격을 받은 한진텐진호 선원들이 전원 무사한 것으로 확인된 다음날인 22일,최 회장은 직원들과 만난 자리에서 이렇게 절 이야기부터 꺼냈다. 회의에 참석한 한 임원은 최 회장의 눈빛에는 그리움이 가득했지만,말투는 결연했다고 전했다. 그는 "최 회장은 조 전 회장이 함께 해준 덕분에 상황이 무사히 마무리 될 수 있었으며,앞으로의 한진해운 역시 무사항해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하고 있다"고 말했다.

◆비상 상황실 지휘

"긴장하지 말고 침착하게 대응합시다. 선원들의 안전이 최우선입니다. "

지난 21일 새벽 최 회장은 한진텐진호가 해적의 공격으로 일촉즉발의 상황에 몰렸다는 보고를 받고,공항으로 향하던 차를 돌렸다. 경남 거제 삼성중공업에서 열릴 예정이던 1만TEU급 컨테이너선 '한진차이나' 명명식장에 가기 위해 김포공항으로 가던 길이었다. 명명식은 해운사로서는 중요한 행사였지만,최 회장은 이날의 모든 일정을 취소시켰다. 여의도 본사로 돌아온 그는 오후 9시 선원들이 모두 무사하다는 정부의 공식 발표가 있기까지 비상상황실을 단 한번도 떠나지 않았다. 비상상황실의 실장은 대외적으로는 김영민 사장이었지만,사실상 최 회장이 상황을 진두지휘했다는 게 회사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최 회장은 매뉴얼에 따라 상황을 처리해야 한다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고 한다. 상황실에서 최 회장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본사 부장급 직원 두 명을 국토해양부와 외교통상부로 보내 상황에 협조하라는 지시였다. 선박 상황에 대해서는 해운사가 가장 잘 알기 때문에 정부와 한진해운의 공조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판단에서였다. 동시에 한진해운 소속 선박과 선원 관리를 하는 자회사인 부산의 한진SM에도 상황실을 설치해 화상회의로 정보를 공유토록 했다.

하루 종일 좁고 열악한 상황실에서 김밥으로 끼니를 해결하면서도 최 회장은 직원들과 선원 가족 챙기기를 잊지 않았다. 한진텐진호 선원들이 무사하다는 소식이 전해진 뒤 한진SM 대표가 선장과 통화하기 전엔 "무사해서 정말 정말 감사하다는 말을 꼭 전해 달라"고 당부했다. 또 부산 직원들에게 "수고한 우리 직원들 얼굴 좀 크게 보자"며 화면으로 가까이 오라고 한 뒤 격려했다.

◆침착한 대응 돋보여

최 회장은 남편인 조 전 회장의 타계로 2007년 1월부터 한진해운을 경영해왔다. 2009년 이후 해운업계가 사상 유례없는 불황에 빠졌지만,전문경영인인 김 사장과 함께 위기 상황을 성공적으로 극복하면서 경영능력을 인정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기업 경영의 경험이 짧은 탓에 그의 리더십 평가에는 의문 부호가 여전히 남아 있었던 게 사실이다.

그는 이번 사태를 계기로 한진해운그룹의 오너경영인으로서 능력과 함께 위기 상황을 진두지휘하는 리더십을 인정받게 됐다. 한진해운 관계자는 "최 회장의 신속한 의사결정과 여유있고 침착한 대응으로 직원들의 신뢰가 한층 커졌다"며 "대외적으로도 실력을 갖춘 경영인으로 인정받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유정 기자 yj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