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알고 싶어하지 않았던 사람,스스로 태어난 사람 '자루'.그는 오랜 친구 주영의 집을 찾아가 초인종을 누른다. "저 호석인데 주영이 있어요?" 주영의 엄마는 아들이 집에 없으니 내일 오라며 돌려보낸다. 그러나 문앞에 쪼그리고 앉아 기다리는 자루.하는 수 없이 들어오게 한 주영 엄마는 아들 친구와 식탁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막이 바뀌면서 시간은 자루가 태어나기 전으로 거슬러 오른다. 억척스러운 식당 주인 금옥은 포주를 피해 자기 집으로 피신해온 흑인 여자를 구해주고 순이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어느날 아들 종구가 순이를 임신시켰다는 것을 안 금옥은 둘을 결혼시키고는 아들에게 "순이에게 절대 말을 가르쳐선 안 된다. 말을 알면 우리가 생각하는 걸 생각하게 된다"고 당부한다. 흑인 순이와 종구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자루다.

다시 주영의 집.아들과 통화한 주영 엄마는 호석의 본명이 '자루'라는 것과 아들이 그를 소름끼치게 싫어한다는 사실을 알고 쫓아내려 한다. 그러자 자루는 "이제 다 필요없어.잘 보일 필요도 없어.주인이 오셨다. 내가 이 집의 주인이다"고 외친다.

자루는 또래 집단에 속하고 싶은 과도한 노력 때문에 '지독한 인간,너무 착해서 이상한,괴물 같은 놈'이 돼버린 인물.그를 매몰차게 버린 친구가 주영이었다. 자루는 친구와 친구 어머니를 죽인 뒤 이 모든 것이 흑인 엄마 순이로부터 비롯됐다고 생각한다.

국립극단 봄마당의 '주인이 오셨다'(사진)는 주종의 권력관계가 부른 끔찍한 결과를 정면으로 다뤘다. 자루가 '살인을 저지르는 과정'이 아니라 '살인범이 될 수밖에 없었던 과정'에 초점을 맞춘 것.순이를 통해 다문화사회의 이면을,자루를 통해 학교라는 집단의 뒤틀린 권력관계를,금옥을 통해 남녀간의 주종관계를 보여주며 권력의 모순에 다층적으로 접근했다. 그 모순의 결과를 압축적인 언어와 절제된 이미지로 표현했다.

자루 역할의 이기돈은 천사같던 한 남자가 사이코패스로 돌변하는 과정을 소름끼치도록 연기했다. 순이 역의 문경희는 표정과 몸짓만으로 많은 것을 말했다.

자루는 결국 교도소에 갇힌다. 탄자니아로 돌아간 순이와 통화하며 그는 교도소에서 처음 배운 엄마의 언어 '스와힐리어'를,순이는 서툰 한국어를 구사한다. "커기선 한번도 배우지 못한 말울 여기 와써 배웠쏘.초음엔 무섭키만 했던 말인데,알고 버니 노무 알음다워."

누군가와 닮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회에서 외면받고 폭력에 길들여진 이들은 결국 잔인한 '주인'이 되어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제목처럼 우리 곁엔 이미 '주인'이 오신 걸까. 내달 1일까지 백성희장민호극장.(02)3279-2233

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