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에게서 이런 질문을 받았다고 생각해 보자. 만약 당신이 앞으로 살아야할 날이 하루밖에 남지 않았다면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내겠느냐고 말이다. 대답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럼 질문을 조금 바꾸어 앞으로 60년쯤 더 산다고 가정한다면, 그 세월을 어떻게 그려나갈 것인지 물었다면 당신은 과연 뭐라 대답할 것인가?

처음에는 이 두 질문에 굉장한 차이를 느끼며 머릿속에서 이리 굴리고 저리 굴려 보겠지만 사실 깊이 따져보면 두 질문사이에는 큰 차이가 없다는 사실을 발견할 것이다. 시간이 많이 주어진다고 해서 기본적으로 갖고 있는 생각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처음이든 나중이든 겉으로 표현된 행동은 마음 한 구석에 잠재하고 있던 한 생각이다.

일생을 살면서 처음 마음대로 일관(一貫)되게 사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처음에는 지조(志操)있게 살고자 해도 상황이 바뀌고 어려워지면 의(義)보다는 이(利)를 따라 가게 된다. 특히 경제적인 이(利)에 많이 흔들리게 된다. 이처럼 처음과 끝이 다른 경우, 사람들은 마지막 행동을 보고 그 사람을 판단하게 된다. 끝이 좋지 않으면 그 사람은 처음부터 좋은 생각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혹자는 처음에는 좋았던 부분도 있지 않았냐고 항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최후 생각이 처음 생각이 되는 것이다.

얼마 전 독립유공자로 포상까지 받았던 19명의 친일행적이 드러나 내려졌던 서훈이 취소되었다. 아무리 일제 강점초기에 일제의 만행을 비난하고 독립운동에 기여한 공이 있다 해도, 그 뒤 일제에 협조하여 친일행위를 했다면 독립유공자가 아니라고 판단을 한 것이다. 우국충정의 처음 마음을 끝까지 지키지 못한 그들은 지사(志士)대신 친일 행위자라고 불리게 되었다. 아무리 시작은 좋았다고 변명해도 그 후에 그들이 행한 친일행위의 오명은 벗을 수가 없다. 마무리가 나쁘면 전체가 나쁜 것이다. 좋았던 처음이 아니라 최후의 행동에 대한 업보를 받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4대 성인 중 한사람이다. 그가 좋은 가르침과 훌륭한 제자를 길렀어도 친구의 권유대로 독배를 마시지 않고 도망쳤다면 사람들이 그를 성인(聖人)으로 불러주었을까. 아마 이름조차 기억되지 못했을 것이다. 독배를 마신 신념어린 최후의 행동이 후세사람들이 그를 성인으로 만든 것이다.

독립유공자나 소크라테스가 아니더라도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은 처음이 아니라 그 사람이 보여준 최후행동이다. 최후의 행동이 어떤가에 따라 평가는 달라지는 것이다. 그래서 선한 사람도 후에 악한 행동을 했다면 세인들은 그를 악한 사람이라고 평가를 하고, 악한 사람도 참회하고 최후에 선(善)한 행동을 하였다면, 그 사람은 선(善)한 사람으로 평가를 받는다. 이처럼 한 생각이 매우 중요한 것이다.

성실하고 손재주가 좋은 어느 목수가 사장에게 건축 일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내려가겠다고 했다. 사장은 그가 그만두는 것이 아쉬워 마지막으로 낡은 집의 수리를 도와 달라고 했다. 그 목수는 퇴직하기로 마음먹은 터라 자재에 신경도 안 쓰고 마감도 엉성하게 대충 처리했다. 집이 다 만들어지자 사장은 집 열쇠를 목수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이것이 당신 집이다. 내가 당신에게 주는 퇴직 선물이다.” 만약 목수가 초심을 잃지 않고 끝까지 성실하게 일을 했다면 멋진 집을 선물로 받았을 것이다.

시종여일(始終如一), 시작과 끝이 같기란 참으로 어렵다. 그래서 사람은 누구나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며 산다. 다만 그것이 이기적이거나 굴종적인 타협이 아니면 된다. 마음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방편적 타협이면 된다. (hooam.com/whoim.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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