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돌아봐도 웃음이 절로 나온다. 기자가 벤 버냉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을 만난 것은 지난해 7월21일 백악관 인근 로널드 레이건빌딩에서였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80년 만에 월가를 대수술하는 금융감독개혁법에 서명한 날이었다. 서명식장에는 티머시 가이트너 재무장관,게리 로크 상무장관을 비롯해 정부 고위 관계자들이 총출동했다. 축제 분위기 속에 버냉키 의장도 눈에 띄었다. 그는 소문대로 수줍음을 많이 타는 듯했다. 실낱 같은 미소만 흘린 채 몇몇 지인들과 짧은 대화를 나누는 모습뿐이었다. 그를 찾아 인사하는 정부 관료들이나 외부 초청객들은 드물었다.

행사가 끝나자 버냉키는 총총 걸음으로 자리를 떴다. 기자는 그의 꽁무니를 바짝 따라붙었다. 당시 FRB가 '제로(0) 금리' 정책기조에서 벗어나 출구를 찾을지 초미의 관심이었다. 그가 가장 가까운 문으로 수월하게 나가는 순간,경호원이 "출구를 잘못 찾았다"며 그를 행사장 안으로 돌려세웠다. 당황한 버냉키는 그제서야 경호원의 안내에 따라 행사장 인파를 헤집고 올바른 출구를 찾아나갔다. 출구 밖까지 뒤를 밟은 기자는 통화정책 변화를 묻는 질문을 그에게 던졌지만 도통 무응답이었다.

그날 오후 의회 청문회에 출석한 버냉키는 금리정책에 변화가 없다고 재확인했다. 시장의 예상을 깬 것은 8월10일.FRB는 만기가 돌아오는 보유 증권의 원리금을 시중에서 장기 국채를 사들이는 데 재투자하겠다고 전격 발표했다. 출구가 아니라 오히려 달러를 더 풀어 논란이 되고 있는 2차 양적완화 정책의 신호탄을 쏘아올린 것이다. 출구찾기에 나섰다가 행사장 안으로 다시 발걸음을 옮긴 것처럼 그의 달러 유동성 추가 정책은 그렇게 시작됐다.

그랬던 버냉키 의장이 27일 공개시장위원회(FOMC) 회의를 가진 뒤 FRB 역사상 처음으로 공식 기자회견을 갖는다. 전 세계는 미국이 달러가치 안정을 위한 출구를 제대로 찾아야 한다는 관점에서 그의 입을 주목한다. 금융위기 이후 FRB의 제로금리 정책과 1,2차 양적완화로 풀린 달러의 과잉 유동성이 원자재 석유 식료품의 가격 상승 등 글로벌 인플레를 초래하고 있다는 세계적 비난이 거세다. 그는 인플레 수출 비난에 "미국 경제가 살아나야 세계 경제가 산다"고 주장하며 달러가치 하락을 아랑곳하지 않아왔다.

그러나 상황은 심각하다. 갤런당 4달러에 육박한 휘발유 가격은 미국 내 저소득층과 중산층에도 이미 고통을 주고 있다. 달러화에 신뢰를 잃어버린 유타주(州)는 지난 3월 금화 통용을 허용해 FRB의 통화체제에 반란을 일으켰다. 달러로 외환보유액을 채운 각국의 중앙은행과 달러 표시 자산을 보유하고 있는 투자자들이 달러가치 하락에 아우성이다. 안전 투자의 대명사인 워런 버핏은 침몰하는 달러호를 탈출 중이다. 최근 한국과 인도를 방문한 자리에서 현지화로 이익을 내는 현지 기업을 인수하겠다고 떠들어댔다.

버냉키 기자회견이 시작되기 1시간45분 전 FOMC는 2차 양적완화를 시한대로 6월 말 종료하고 제로금리 기조를 유지하는 결정을 내릴 것으로 시장은 관측한다. 버냉키와 FRB가 지난해의 출구 역행을 재연하지 않는다면 달러가치 하락을 부추기는 요인들 가운데 한 가지를 제거하는 것이다. 그 다음이 기준금리 인상일 터이다. 미국 정부와 의회는 막대한 재정적자와 부채를 시급히 감축해 달러 안정화 출구를 찾아야 한다. 이를 채찍질하는 역할도 버냉키가 맡아주길 전 세계는 기대하고 있다.

김홍열 한국경제신문 워싱턴 특파원 come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