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의가 아니었다? 현직 판사가 성추행 현행범으로 붙잡히고도 '고의가 아니었지만 불쾌했다면 미안하다'고 진술했다고 한다. 보도에 의하면 그는 지하철 승강장에서 서성거리다 반바지 차림의 젊은 여성이 나타나자 뒤따라 탄 다음 추행했다. 그게 고의가 아니면 그가 생각하는 고의란 과연 어떤 건가.

'불쾌했다면'은 더 황당하다. 만일 누군가 자기 엉덩이에 몸을 밀착시키고 자신이 한 행동과 똑같은 짓을 했다면? 그런 일의 피해자가 자신의 아내나 딸이라면? 그럴 수도 있다거나 우발적 충동으로 저지른 일이니 너그럽게 봐주자고 했을까.

그가 과거 성폭행이나 성추행 재판을 맡았었다면? 만에 하나 비슷한 윤리의식을 지닌 법관이 또 있다면.입에 담기조차 끔찍한 나영이 사건의 범인 조두순에 대한 선고가 왜 고작 징역 12년이었는지,'여성 배석판사들과 함께 근무하는 부장판사의 유의점'이란 매뉴얼이 왜 생겼는지 짐작하게 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보도를 접한 대다수 전 · 현직 법관들은 민망하고 참담했을 것이다. 그것도 하필 법의 날(25일)을 앞두고 발생했다는 사실은 당혹스럽기 짝이 없었을 게 틀림없다. 판사더러 성인(聖人)이 되라고 할 사람은 없다. 그저 '법관은 명예를 존중하고 품위를 유지한다'는 윤리강령이라도 지켜줬으면 할 따름이다.

막말 판사,무성의한 판사,비리 판사,제멋대로 판사에 성추행 판사까지 등장하는 건 사법시험과 판사 임용과정에서 성품과 인격 유무를 제대로 거르지 못한 탓도 있겠지만 그보다 그동안 잘못을 저지른 이들에 대한 처벌이나 징계가 거의 없었던 법원의 지나친 제 식구 감싸기가 더 큰 원인이라고 봐야 한다.

법관윤리강령엔 '법관은 소송관계인을 친절하고 정중하게 대한다'고 돼 있고 이를 어길 경우 징계하도록 하고 있지만 법원의 판사 징계는 예를 찾기 어렵다. 작년 7월 문제가 된 막말 판사에겐 법원장이 말로 주의를 주는 데 그쳤다.

2005년 부산고법에서 증인에게 "당신 IQ가 얼마야.거의 개 수준이구먼"이라고 말한 재판장 또한 처벌받긴커녕 승승장구하고 있다는 마당이다. 72자 판결 사건 역시 법원행정처가 서울 북부지법 법원장에게 조사 결과를 통보하는 선에서 마무리됐다는 보도다.

성추행 판사에 대해서도 직무와 상관없는 개인비리라며 사표를 수리,변호사 개업에 지장 없게 만들었다. 전 · 현직 판사에 대한 영장 또한 툭하면 기각된다고 한다. 광주지법은 친형 · 친구 · 운전기사를 법정관리인 · 감사에 앉히거나 추천해 파문을 일으킨 선재성 수석 부장판사의 의혹을 캐려는 검찰의 압수수색 · 통화추적 영장을 모두 기각했고,대전지법은 현직 부장판사가 보험설계사에게 변호사를 소개하고 금품을 받았다는 의혹과 관련해 경찰이 신청한 자택 압수수색 영장을 기각하면서 "가정의 평온을 깰 우려가 있다"는 이유를 달았다고 할 정도다.

법과 인간 존엄의 가치를 지키지 않는 이들에게 면죄부를 줌으로써 존경받는 법관과는 멀어도 너무 먼 이들을 양산해온 셈이다. 법관의 인격과 성품을 판정할 장치를 만들기는 쉽지 않다. 인 · 적성 검사나 면접으로 가능할 리도 없다.

결국 수많은 법관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꼴뚜기 법관을 막자면 법원의 제 식구 감싸기나 문제를 일으키고도 옷만 벗으면 변호사로 개업,떼돈을 벌 수 있는 제도에 제동을 거는 수밖에 없다. 사법 개혁을 통해 판사 임용시스템을 바꾼다지만 그 전에라도 법정의 권위를 회복하려면 부패와 비리 판사는 물론 최소한의 도리조차 지니지 못한 판사에 대한 보다 엄중한 제재 조치가 있어야 마땅하다.

그래야 국민은 물론 누가 뭐래도 공정하고 올바른 재판을 하기 위해 밤잠을 설치는 수많은 판사들의 자괴감도 달래줄 수 있다. 이귀남 법무부 장관은 법의 날 기념식사를 통해 "공정하고 투명한 법 집행 기준을 확립하고 부패를 척결하며 공직윤리를 강화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말은 필요 없다. 중요한 건 실천이다.

박성희 < 수석논설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