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기기관은 인류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은 결정적 발명이지만,사실 그 원리는 로마시대에도 알려져 있었다. 다만 그때는 황제가 사는 곳의 문을 자동으로 여닫는 신기한 '장난감'에 불과했고 사회 구조 전체를 혁신시키지는 못했다. 노예 노동력의 존재로 혁신이 전혀 필요치 않았기 때문이라고 역사가들은 말한다.

경제발전이 한계에 다다라 새로운 돌파구가 절실히 필요하게 된 18세기에 증기기관은 새로운 시대를 여는 동력으로 작용했다. 최초로 증기기관을 발명한 사람은 토머스 뉴커먼이었다. 그렇지만 뉴커먼의 증기기관은 많은 결점을 안고 있었다. 2층 건물 높이의 거대한 규모에 엄청난 양의 석탄을 소비하면서도 정작 힘은 성능 좋은 물레방아와 큰 차이가 없었다.

이런 결점을 해소해 월등한 성능의 증기기관을 개발한 사람은 스코틀랜드 출신 기계공 제임스 와트였다. 1763년 그는 뉴커먼 기관을 수리하다가 이 기관의 비효율성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이 기관은 중심부에 있는 실린더에 증기가 채워지면 피스톤을 밀어내고,다시 실린더를 냉각시켜 진공 상태가 되면 기압에 의해 피스톤이 실린더 쪽으로 밀려가는 식으로 작동했다.

이처럼 매번 실린더를 가열했다가 다시 냉각시키는 과정에서 열의 5분의 4가 낭비되고 있었던 것이다. 1765년 와트는 별도의 증기 콘덴서(condenser · 액화장치)를 사용함으로써 실린더를 계속 뜨겁게 달군 상태로 유지하는 획기적인 방식을 발견했다. 이제 뉴커먼 기관보다 훨씬 작으면서도 힘이 4배나 강한 기관이 만들어졌다. 와트의 증기기관은 1769년 첫 특허를 받았고, 1776년에 상업적으로 이용되기 시작했다.

초기의 증기기관은 주로 탄광에서 물을 퍼내는 데 사용됐다. 와트는 존 로벅이라는 사람과 동업 관계를 맺고 석탄 광산에서 물을 퍼내는 데 쓸 증기기관 제작을 주문했다. 그러나 당시 스코틀랜드 철물 제작 기술로는 거대한 실린더에 정확하게 딱 맞는 피스톤을 만들지 못했다. 이 때문에 존 로벅은 큰 이익을 얻지 못하고 파산했다.

다시 매튜 불턴과 동업관계를 맺은 와트는 정밀 기계를 제작할 수 있는 버밍엄으로 가서 드디어 자신이 필요로 하던 것을 찾아냈다. 존 윌킨슨이라는 제철업자가 영국 해군으로부터 의뢰받은 대포 제조용 천공기로 우수한 실린더를 만들어냈다. 이제 두 사람은 영국 의회 법령에 의해 25년 연장된 특허권을 가지고 사업을 시작했다.

불턴과 와트의 공동사업은 기업사(企業史)의 가장 모범적인 사례 중 하나다. 불턴의 사업 안목은 와트의 기술적 창의성을 보완했다. 당시 흔히 그랬던 것처럼 사업가가 발명가를 탐욕스럽게 착취하는 일 없이 두 사람 모두 성공을 거두었다. 사업가 불턴은 새로운 시장 기회를 확실하게 파악했고,과학자 와트는 그 기회를 충족시킬 새로운 증기기관들을 디자인해냈다.

이제 물을 퍼 올리는 분야보다 더 큰 시장이 열리고 있었다. 지금까지 많은 공장들이 작은 강 근처에서 물레방아를 동력으로 삼아 움직이고 있었지만,곧 증기기관이 이것을 대체하게 된 것이다. 1782년 와트는 회전식 증기기관을 개발했다. 이것이 새로이 형성되던 공장 시스템과 연결됐다. 이제 영국의 산업혁명은 본격적인 궤도에 올라섰다.

물레방아 동력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농촌에 공장을 지어야 했다. 이런 농촌 공장으로는 고아원이나 구빈원 출신 아동 노동자들을 많이 보냈다. 그런데 증기기관은 이 모든 것을 변화시켰다. 공장은 노동자와 석탄을 쉽게 얻을 수 있고 시장과도 가까운 도시로 이동해 갔다. 간단히 말해서 증기기관은 산업의 도시화를 가져왔다.

1782년 단 두 곳의 공장밖에 없었던 맨체스터에는 20년 후 52곳의 공장이 생겨났다. 가내 수공업에서 공장제로 바뀐 후 많은 노동자들이 공동 구역에서 정확한 시간 일정에 맞추어 일하는 표준화 · 기계화된 시스템이 정착되어 갔다. 와트는 증기압,밸브,실린더의 디자인들을 계속 실험하면서 증기기관의 개선에 몰두했다. 그는 자신의 디자인 일부를 표절했던 존 윌킨슨을 비롯한 많은 특허 침해자보다 한 걸음 더 앞서나가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1788년 와트는 불턴의 제안으로 기관의 속도를 자동적으로 조절하는 조속기(調速機)를 기관에 덧붙였고,1790년에는 압력계를 추가했다.

처음 사업을 하고 25년이 지난 18세기 말,와트의 증기기관은 훨씬 더 강력해지고 연료 효율이 높아진 동시에 크기가 작아지고 운반도 간편해졌다. 이 기관들은 평균적으로 약 25마력을 발생시켰지만 최대 100마력까지 나오는 기관도 있었다. 불턴과 와트가 원래 계약했던 25년간의 공동경영이 끝난 1800년,64세의 와트는 은퇴해서 건강과 부와 명성을 누리며 살다가 1819년 8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가장 행복한 노후를 보낸 사업가라 할 만하다.

1800년까지 와트의 증기기관은 500대 정도 팔렸다. 이것들은 어디에 쓰였을까. 당시 가장 활력이 넘치는 곳이면 모두 증기기관이 사용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선 석탄 및 주석 광산에서 물을 퍼내는 데 많이 사용됐다. 고품질 주철 생산을 가능하게 한 용광로용 송풍기도 증기기관이 움직였다. 18세기 말에는 면직물,모직물,맥주,밀가루,도자기 공장에 가장 많이 사용됐다. 1786년 런던에 있는 세계 최대의 제분공장에는 2개의 증기기관이 50쌍의 맷돌을 움직였다. 많은 도시에서는 증기기관이 강물을 퍼 올리고 있었다.

기계는 인간을 해방시켰을까. 꼭 그렇지는 않다. 노예가 많았을 때는 증기기관을 필요로 하지 않더니,정작 증기기관이 등장하자 많은 노동자들이 노예처럼 살게 되었으니 말이다.

주경철 <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