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단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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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 '의리적 구토(義理的 仇討)'가 개봉된 곳은 단성사였다. 연극 공연 도중 영화장면을 일부 끼워넣은 '연쇄극'이었으나 관객들은 신기해서 넋을 잃었다고 한다. 입장료는 특등석 1원50전,1등석 1원,2등석 60전,3등석 40전이었단다. 설렁탕 한 그릇에 10전을 받던 시절이었으니 꽤 비쌌던 셈이다. '첨단 문화'를 향유하는 대가로 이 정도는 지불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걸까.
춘사 나운규의 '아리랑'도 단성사에서 개봉됐다. "이 몸이 삼천리 강산에 태어났기에 미쳤고 사람을 죽였습니다. 지금 이곳을 떠나는 영진은 죽음의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갱생의 길을 가는 것이오니 여러분 눈물을 거두어 주십시오…." 1926년 10월1일 아침에는 조선총독부 건물 낙성식에 참여했다가 저녁엔 나운규의 연기를 보며 눈물을 펑펑 쏟았다니 그런 아이러니가 없다. 1924년 한국인이 만든 최초의 극영화 '장화홍련전'도 단성사에서 상영됐다.
1907년 좌포도청이 있던 자리에 2층 목조건물로 세워진 단성사는 일반 연회장으로 쓰이다가 1918년 전문 영화관으로 탈바꿈했다. 당대 최고의 흥행사로 꼽히던 박승필이 인수하면서부터다. 박승필은 국악전문공연장 광무대와 단성사를 동시에 운영함으로써 일본인들이 주도하던 흥행계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해방 후엔 힘겹게 살아가던 젊은이들에게 위안과 즐거움을 주는 문화의 터전이었다. '역마차''애수''쿼바디스''셰인''대부''겨울여자''장군의 아들''서편제'….지정좌석이 따로 없었던 만큼 서로 좋은 자리에 앉으려고 고성이 오가기도 했다. 건장한 체격을 가진 '기도'의 눈을 피해 몇회를 연속해서 보는 이들도 있었다. '단성사 키드' 중에선 한국영화의 주역도 여럿 나왔다.
멀티플렉스에 밀려 고전하던 단성사가 매물로 나왔다. 기존 건물을 헐고 2005년 10개관 1800여석 규모로 재개관했다 부도 처리되는 바람에 리모델링 후 다시 문을 열 예정이었다. 그러나 공사비를 주지 못한 모양이다. 여섯 차례의 공매에서 모두 유찰돼 수의계약을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1913년 개관한 국도극장은 1999년 사라졌고,'자유부인'을 상영했던 수도극장도 철거됐다. 경쟁에 밀렸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기는 하다. 그래도 근대문화의 한 상징이 심한 부침을 겪는 걸 지켜보기가 안타깝다.
이정환 논설위원 jhlee@hankyung.com
춘사 나운규의 '아리랑'도 단성사에서 개봉됐다. "이 몸이 삼천리 강산에 태어났기에 미쳤고 사람을 죽였습니다. 지금 이곳을 떠나는 영진은 죽음의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갱생의 길을 가는 것이오니 여러분 눈물을 거두어 주십시오…." 1926년 10월1일 아침에는 조선총독부 건물 낙성식에 참여했다가 저녁엔 나운규의 연기를 보며 눈물을 펑펑 쏟았다니 그런 아이러니가 없다. 1924년 한국인이 만든 최초의 극영화 '장화홍련전'도 단성사에서 상영됐다.
1907년 좌포도청이 있던 자리에 2층 목조건물로 세워진 단성사는 일반 연회장으로 쓰이다가 1918년 전문 영화관으로 탈바꿈했다. 당대 최고의 흥행사로 꼽히던 박승필이 인수하면서부터다. 박승필은 국악전문공연장 광무대와 단성사를 동시에 운영함으로써 일본인들이 주도하던 흥행계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해방 후엔 힘겹게 살아가던 젊은이들에게 위안과 즐거움을 주는 문화의 터전이었다. '역마차''애수''쿼바디스''셰인''대부''겨울여자''장군의 아들''서편제'….지정좌석이 따로 없었던 만큼 서로 좋은 자리에 앉으려고 고성이 오가기도 했다. 건장한 체격을 가진 '기도'의 눈을 피해 몇회를 연속해서 보는 이들도 있었다. '단성사 키드' 중에선 한국영화의 주역도 여럿 나왔다.
멀티플렉스에 밀려 고전하던 단성사가 매물로 나왔다. 기존 건물을 헐고 2005년 10개관 1800여석 규모로 재개관했다 부도 처리되는 바람에 리모델링 후 다시 문을 열 예정이었다. 그러나 공사비를 주지 못한 모양이다. 여섯 차례의 공매에서 모두 유찰돼 수의계약을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1913년 개관한 국도극장은 1999년 사라졌고,'자유부인'을 상영했던 수도극장도 철거됐다. 경쟁에 밀렸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기는 하다. 그래도 근대문화의 한 상징이 심한 부침을 겪는 걸 지켜보기가 안타깝다.
이정환 논설위원 jh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