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사람들이 주민회의를 열었다. 평균수명은 늘어나는데 노후대비 저축은 필요한 만큼 못하고 있다고 반성한 뒤,젊어서부터 일정금액을 강제로 저축하자고 서로 약속했다. 그렇게 모은 돈을 수십년간 '잘 굴려서' 노후에 쓰자고 정했다. 다들 생업에 바쁘니 능력 있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을 뽑아 운용을 맡기자고 약속했다. 약속대로 열심히 돈을 내 기금은 금방 커졌다. 그런데 그러고는 막상 자산운용은 동네식당 주인에게 맡겼다고 한다면,상황은 갑자기 시트콤이 되고 만다.

웃지 못할 이 희극적 상황이 현실로 존재한다. 바로 우리나라 국민연금이다. 1988년 제도가 시작된 국민연금은 작년 말 기금자산이 325조원에 달했다. 밖으로는 세계 연기금 중 네 번째이고,안으로는 민간의 공모펀드를 모두 합친 것보다도 크다.

국민연금 기금 규모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면서 국민연금의 운용방식은 이제 국민의 노후대비를 넘어 우리나라 금융시장의 질서,나아가 한국자본주의의 성격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사안이 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위탁운용이 점차 늘어나면서 국민연금의 행태가 자산운용업자들 간 경쟁질서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또 최근 곽승준 미래기획위원장의 언급으로 논란이 뜨겁듯이,국민연금이 기업의 주요 주주로 등장하면서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이 기업 지배구조의 성격을 좌우할 가능성도 보이고 있다.

그런데 정작 국민연금 운용을 총괄하고 있는 기금운용위원회의 구성은 전문성과는 거리가 있다. 운용위원직이 비상근인 데다 가입자 대표의 자격으로 참여하는 각종 직능단체,사회단체 관련자들이 위원을 맡고 있다. 말 그대로 온 국민의 돈을 모아 막상 비전문가에게 총괄운용책임을 맡기고 있는 셈이다.

2008년 정부는 국민연금기금운용을 전담할 기구로 국민연금기금운용공사를 설립하고 민간위원으로 구성되는 상설 운용위원회를 공사의 지배기구로 설립한다는 국민연금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한 바 있다. 비록 법개정으로 이어지지는 못했지만,이 개정안은 일단 기금운용의 독립성과 전문성 제고라는 측면에서 진일보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독립된 기금운용기구와 위원회의 감시를 누가 담당할 것인지의 문제는 그대로 남겨두었다는 점에서 미흡했다. 민간전문가에게 운용을 맡기는 것은 당연하지만,민간전문가가 아무런 감시와 유인책이 없는데 운용에 최선을 다할 것으로 믿는다면 순진한 생각이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남긴 교훈의 하나는 적절한 감시와 유인이 없는 경우 이른바 시장의 금융전문가는 가장 위험한 사고를 칠 수 있다는 것이다. 운용에 전념할 전문가로 구성된 상설 운용위원회의 설립과 더불어 이 운용위원회의 감시기구이면서 동시에 기금제도 전체를 관리할 기금관리기구의 설립이 필요하다. 정치권,정부,학계가 모두 머리를 맞대고 국민연금 지배구조의 근본적인 개혁방안을 진지하게 논의하고 확정할 때다.

신인석 < 중앙대 경영학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