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일본 대지진이 발생한 다음날인 3월12일 에다노 유키오 관방장관은 기자회견에서 언론사에 두 가지를 당부했다. 첫째 인명 구조에 방해가 되니 피해 현장에 헬리콥터를 띄우지 말 것.둘째 사체나 울부짖는 유족들의 사진과 영상을 보도하지 말 것.이후 일본 언론은 이 '보도지침'을 철저히 이행했다. 일본 언론이 '3 · 11 대참사'를 담담하고 차분하게 보도한 배경이다.

언론뿐 아니라 일본 국민들도 정부를 잘 따랐다. 후쿠시마 원전 폭발 이후 피난구역 설정을 놓고 정부가 우왕좌왕할 때도 국민들은 꾹 참고 기다렸다. 피난소에 한 달 이상 식량이 지원되지 않아도 공무원에게 삿대질하는 이재민은 한 명도 없었다. 이를 본 한국의 공무원은 "일본인은 정말 통치하기 좋은 국민"이라고도 말했다. 한국과는 대조적인 국민들의 순종적 팔로어십(followership)이 부럽다는 얘기다.

그러나 이렇게 말 잘 듣는 국민을 이끄는 일본의 리더십은 낙제점이었다. 대지진과 쓰나미,원전 사고 이후 초동 대응에 실패하고 위기관리에서도 무능함을 보여준 간 나오토 총리는 야당으로부터 '존재 그 자체가 재난'이란 비아냥을 듣고 있다. 국민들이 고통받는 재난 현장에 제일 먼저 달려 갔어야 할 총리이지만,원전사고 발생 40여일이 지난 뒤에야 후쿠시마현 피난소를 방문했다. 후쿠시마원전 운영사인 도쿄전력의 사장은 수소 폭발이 잇따르는 긴박한 상황에서 몸이 아프다며 1주일 이상 자리를 비웠다.

국민들을 보호하고 이끌어야 할 진정한 리더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일본의 리더십 실종엔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세습 정치'의 폐해를 빼놓을 수 없다. 일본에서 정치를 하려면 부모로부터 세 가지를 물려 받아야 한다는 말이 있다. 지반(地般 · 지역기반) 감반(看板 · 지명도) 가방( · 선거자금)이다. 한마디로 능력보단 출신이 중요하다는 얘기다.

2009년 일본 중의원 선거에서 부모의 지역구를 물려 받아 당선된 의원은 87명으로 전체(480명)의 18%를 넘는다. 지난 4년간 총리가 됐다가 1년 만에 낙마한 아베 신조,후쿠다 야스오,아소 다로,하토야마 유키오 등 단명 총리들은 모두 세습 정치인이다. 금 수저를 입에 물고 나와 자신의 노력이나 능력과는 무관하게 정치인이 된 '도련님'들은 지도자로서의 경쟁력과 리더십을 전혀 보여주지 못했다.

물론 이런 정치 세습이 가능한 건 유권자들이 용인하기 때문이다. 일본에선 정치도 가업승계가 당연하다고 여겨진다. 우동집 아들이 다른 사람보다 우동을 더 잘 만들듯이,정치는 정치인 아들이 잘할 것이라고 믿는다.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반기를 드는 국민은 없다. 윈스턴 처칠 전 영국총리는 "국민은 꼭 자기 수준에 맞는 지도자를 갖게 돼 있다"고 말했다. 일본의 부실한 리더십도 비판없이 따르기만 하는 순종적 팔로어십이 만들어낸 비극인지 모른다.

그러나 일본의 팔로어십에도 최근 변화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방사선 공포 속에서 무능한 리더십에 대한 국민적 분노가 터져나오면서부터다. 정부와 각을 세우지 않던 언론들도 간 내각을 연일 두들긴다. 피난소를 찾은 간 총리에게 일부 이재민은 "왜 이제야 왔느냐"며 대들 기세로 따졌다. 사상 초유의 대지진이 일본의 리더십과 팔로어십 지형에도 균열을 만든 것이다. 일본의 팔로어십이 정말 변하고,리더십을 바꿀 수 있을지 궁금하다.

차병석 한국경제신문 도쿄특파원 chab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