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시절의 어머니는 늘 가계부를 쓰고 계셨다. 가계부를 작성하는 습관은 팔순이 넘은 지금도 여전하시다. 어머니의 가계부는 살림살이를 위한 도구이면서 동시에 우리 집안의 역사가 담긴 소중한 기록물이다. 각종 집안 대소사가 빼곡히 기록돼 있으며,우리 형제들이 성장하는 모습도 그대로 담겨 있다. 어머니께서 가계부를 꼼꼼히 쓰신 이유는 자식들을 번듯하게 잘 키우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형편이 그리 어렵지 않은 데도 불구하고 우리 4남매를 가르치는 일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어머니께서 어렵게 마련해 주신 결혼비용을 아끼고 각종 아르바이트를 하며 힘들게 유학생활을 했을 때도 어머니를 원망해본 적은 없다.

가계부를 쓰는 어머니를 보면서 계획하고 준비하는 삶을 배웠다. 서정주 시인은 '나를 키운 건 8할이 바람'이라고 했다. 지금의 나를 만든 건 5할이 어머니의 가계부 덕이었다. 가계부는 어머니의 노후 대비를 위한 도구이기도 했다. 지금 필자의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의지하지 않고 가끔 손자들에게 용돈도 주면서 편안한 노후를 보내고 계신다. 가계부를 통해 노후를 대비하신 덕분이다. 가계부는 일종의 통계다. 과거와 현재를 분석해 미래를 예측하고 설계하기 위한 도구라는 통계의 개념과 철학을 배우지 않았어도 어머니는 삶 속에서 몸으로 알고 계셨던 것이다.

엄친자모라는 말도 있지만 무뚝뚝하게만 보이는 우리의 아버지들도 속정은 깊었던 것 같다. 언젠가 조선시대에 쓰여진 한글 소설 필사본을 우연히 본 적이 있다. 설명을 보니 당시에는 언문 소설이 혼수로 인기였다고 한다. 그런데 필사본의 작성자인 어느 가난하고 병든 아버지는 형편이 넉넉지 않아 딸에게 이 혼수를 못해줬다. 시집간 딸이 동생의 결혼 때문에 친정에 잠깐 다니러 오자 아버지는 옆집에서 소설책을 빌려 며칠 밤을 새워 필사를 했다. 힘들여 필사를 한 후 아버지가 마지막에 추가한 문장 하나가 가슴을 울렸다. '아비 그리운 때 보거라'.필사본을 건네 받은 딸이 흘렸을 눈물과 그 아버지의 마음이 긴 세월을 넘어 고스란히 전해지는 것 같아 애잔했던 기억이 있다.

고령화 사회의 속도가 빨라지면서 자녀들을 위해 평생 헌신하며 살아온 부모들이 노후 대비를 하지 못해 고통 받고 있는 것을 통계를 통해 확인할 때마다 늘 마음이 불편하고 안타깝다. 통계청이 지난해 9월 발표한 '2010 고령자 통계'에 따르면 고령자의 61%가 '노후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응답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통계에도 우리나라 65세 이상 노령인구의 소득 빈곤율이 45.1%로 OECD 국가 중 가장 높게 나왔다. 준비 없이 노후를 맞이한다면 장수는 축복이 아니라 재앙이다. 고령화 대책이 시급한 이유다.

언젠가부터 어버이날 '부모님이 가장 받고 싶은 선물' 1위가 현금이 되었다. 노후대비를 못한 부모들의 현실을 반영하는 것 같아 씁쓸한 기분이 든다. 고령화 대책이 힘을 발휘해 자식들의 정성을 담은 선물이 다시 1위가 되는 날이 어서 오기를 기대해본다.

이인실 < 통계청장 insill723@korea.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