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완당,묵소거사 등의 호를 가진 김정희(1786~1856)는 서예뿐만 아니라 금석학 시문학 경학 불교에 두루 능했다. 독특한 추사체는 물론 문인화에서도 새로운 경지를 이뤘다.

그의 난초와 매화 그림은 시각적 재현이라기보다 서예적 필묵의 운용에서 나온 독특한 예술이다.

글씨를 쓰듯 그려나간 그림들은 그의 학문과 예술이 일치하는 이상적인 경지를 보여준다.

추사를 비롯해 조선 제일의 묵죽화가로 알려진 탄은 이정(1541~1622),수운 유덕장(1675~1756),우봉 조희룡(1789~1866),겸재 정선,단원 김홍도,현재 심사정 등 조선 중기 이후 쟁쟁한 화가들의 사군자(매화 · 난초 · 국화 · 대나무) 그림을 모은 회화전이 열린다.

우리 문화유산의 보물창고로 불리는 서울 성북동 간송미술관이 오는 15~29일 마련하는 봄 정기 전시회 '사군자 대전'이다. 이번 전시회에는 조선 중기 이후 사군자 그림의 형성과 변모 · 완성 과정을 훑어볼 수 있는 대표작 100여점이 한꺼번에 나온다.

추사 문하에서 난을 배운 흥선대원군,추사의 난죽법을 전수받아 독특한 운미 난죽법(蘭竹法)을 창안한 민영익까지 20세기 사군자 그림도 아우른다.

이들의 사군자 회화를 비교해 보면 조선 중기 이후 진경 시대의 문인화풍과 '추사 정신'이 들어간 그림,중국 풍 그림의 차이를 이해할 수 있다.

조선 중기 문인화의 백미는 역시 이정의 이금(泥金 · 아교에 개어 만든 금박가루)을 활용한 대나무 그림이다. 그의 '고죽(枯竹)'과 '우죽(雨竹)'은 댓잎이 위로 뻗어 올라가는 모습과 비를 맞은 대나무를 리얼하게 표현한 작품.굳세면서도 능숙한 운필이 잘 살아 있다.

추사와 그의 제자인 중인 출신 화가 조희룡의 난 그림도 나란히 걸린다. 글씨 예서의 방식으로 난초를 그린 추사의 작품이 척박한 땅에 뿌리 내린 난의 청향(정신)을 잘 녹여냈다면 조희룡의 작품은 회화적인 기법에 노련하면서도 자유스러운 경지(형식)를 담아냈다.

조선 중기 매화 그림의 대가인 설곡 어몽룡의 작품도 관람객을 맞는다. 설곡의 매화도는 이정의 묵죽,황집중의 묵포도와 함께 당시의 삼절(三絶)로 불렸다.

그의 묵매화는 야들야들한 줄기가 곧게 솟아나는 간결한 구도와 단촐한 점매법(點梅法) 형태의 꽃 묘사로 이름났다. 선비의 지조와 절개를 은유적으로 풀어낸 매화의 청초한 분위기가 돋보인다.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난초 그림의 쌍벽인 흥선대원군 이하응과 운미 민영익의 난 그림이다.

이들은 당대 최고의 난초 그림 실력자로 유명하지만 그림 속에 숨은 정신과 표현 방법은 그들의 삶만큼이나 대조적이다.

흥선대원군의 '묵란'의 품새는 수 십개의 난초 가지를 엷고 굵게 차별화해 거친 바람에 흩날리는 그의 인생유전을 보여주는 듯하다. 그와 정치적 대립각을 세운 민영익의 그림은 굵기의 변화가 없어 다소 밋밋하다. 그러나 망국의 한에서 비롯된 긴장감이 배어 있다.

사실적인 묘사가 뛰어난 심사정의 매화,금가루를 활용한 최북의 국화,중국 남송 시대 유명 화가 마원을 능가할 만한 수준이라는 평가를 받은 김홍도의 대나무 그림도 만날 수 있다.

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은 "조선시대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의 덕목과 학문적 역량을 갖춘 군자는 당시의 문화적인 역량을 총체적으로 반영한다"며 "사군자 회화를 통해 시대적인 상황을 읽을 수 있는 기회"라고 말했다. 관람료는 없다. (02)762-0442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