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살고 있는 아파트 앞길에 현수막이 걸렸다. '독막로 ○○도로 개선'.독막로가 우리 동네의 새 이름인 줄 안 건 4월 말 '주소 변경 알림 우편물'을 받은 뒤였다. '도로명 주소' 체계 전면 시행을 불과 8개월 앞두고 통보한 것이다.

아무래도 낯설겠다 싶었을까. 우편물엔 새 주소를 가족들에게 숙지시키라고 돼 있었다. 회사도 마찬가지.한국경제신문은 47년간 사용해온 '중림동 441'을 졸지에 '청파로 463'으로 바꾸게 생겼다.

도로명 위주의 주소 개편은 종래의 지번(地番) 주소에 문제가 많다는 지적에서 비롯됐다. 행정동과 법정동이 맞지 않는데다,600번지 옆이 601번지 아닌 1200번지가 되는 등 연속성이 결여되고,특정 지점을 표현하기 어려워 위치와 경로 안내 기능이 떨어진다는 게 그것이다.

그에 비해 도로명 주소는 길 찾기가 쉽고,물류비가 절감되며,응급상황 발생 시 빠른 대처가 가능한데다,국제적 주소체계 사용으로 국가 이미지를 제고할 수 있다는 게 행정안전부의 설명이다. 외국인의 길찾기 비용 3조1000억원,택배업체의 배달 시간과 운행비 같은 물류비 1598억원 등 사회경제적 비용 절감 효과만 연간 3조4000억원에 달할 것이라고도 한다.

정성적 기대 효과엔 국민의 편리한 생활과 기업의 고객관리 마케팅 강화 및 배달업 고효율화 외에 전자지도 신규산업 확산과 유명건물 평준화도 들어 있다.

과거엔 주소만으로 집 찾기가 어려웠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내비게이션이 발달한 지금 주소 때문에 집을 못찾는 경우는 거의 없다. 오히려 독막로처럼 기존의 동(염리동)과 완전히 딴판인 경우 어딘지 몰라 혼란만 가중시킬 가능성이 높다.

개인은 불편한 정도라지만 기업은 사정이 다르다. 법인 주소는 물론 봉투와 명함까지 몽땅 바꾸고 고객과 거래처 주소도 새로 입력해야 한다. 내비게이션 및 도로 안내판 교체 비용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지번 주소에 익숙한 우체국 집배원들이 난감해질 것도 뻔하다.

연간 3조4000억원으로 추정된 기대 효과가 과연 이런 비용과 부담을 감안한 건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선진국은 다 그렇다지만 우리와 그쪽은 도로 탄생 과정부터 판이하다. '집(특정장소)을 못찾아서' 운운하는 건 내비게이션 발명 이전 얘기다. 뭐든 시작하면 시대와 상황 변화에 아랑곳없이 밀어붙이고 보는 식은 그만둘 때도 됐다.

박성희 수석논설위원 psh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