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돌목은 전남 해남의 화원반도와 진도의 녹진리 사이에 있는 해협이다. 해협을 흐르는 물이 암초에 부딪쳐 튕겨 나오는 소리가 매우 커 '소리 내어 우는 바다 길목'이라는 뜻이다. 하루에 물길이 네 번 바뀐다. 그 위에는 쌍둥이 진도대교가 위용을 자랑하고 바닷물과 어울린 야경은 볼 만하다. 울돌목에서 잡히는 봄철의 숭어는 그 맛이 일품이다.

어린 시절,형의 우수영 소풍 길에 어머니의 손을 잡고 처음 가본 울돌목의 물소리는 무서웠다. 얼마 전에 다시 본 울돌목의 물살은 여전히 무섭다. 그런데 명량대첩이 생각나면서 무서움은 차라리 감동으로 다가온다.

1597년 정유년 이순신은 울돌목의 물살 위에 13척의 배로 서진(西進)하는 왜선을 막아섰다. 음력 9월16일,정유재란의 끝을 재촉하던 날,그는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卽生 必生卽死)'로 조선 수군을 독려했다. 생에 대한 애착이 없을 수 없는 한 인간의 각오라고 하기에는 매우 극단이다. '일당백' '일기당천'이 군대의 사기를 올리고 군기를 다잡는 말이지만 극단임에 분명하다.

이순신의 칼에는 정치가 없었다. 정치라기보다는 권력다툼이라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의 칼은 칼로서 순결하고,이 한없는 단순성이야말로 그의 칼의 무서움이고 그의 생애의 비극이었다. 그리고 이 삼엄한 단순성에는 굴욕을 수용하지 못하는 인간의 자멸적 정서가 깔려 있다"고 김훈은 적고 있다. 어린애처럼 칭얼대는 선조의 타령을 뒤로 하고 피아(彼我) 전력 10 대 1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명량해전을 승리로 이끈 단순 명료하고 담대한 칼이었다. 반면에 정치가 배어 있지 않았던 그의 칼이 개인적으로는 비극적 종말의 원인이었다는 것이다. 그의 난중일기는 절제된 언어로 시종여일(始終如一)하다.

어디 이순신뿐이랴.정치에 얽혀 아수라장에 빠지거나 정치에서 벗어남으로써 빛나는 업적을 남긴 역사적 사례는 많다. 정치적 이유로 자리를 차지했던 원균은 조선 수군을 괴멸시켰다. 세종 때의 집현전 학자들은 단종과 수양대군 사이의 권력다툼에 연루되면서 죽음으로 내몰렸다.

조정의 권력다툼에서 밀려난 송강 정철은 관동별곡,사미인곡,속(사)미인곡과 함께 4대 가사 중의 하나인 성산별곡을 유배지인 전남 담양에서 지었다. 그림자도 쉬어간다는 식영정(息影亭)에서 바라본 별뫼(星山)를 그린 것이다.

정조가 죽자 전남 강진에 18년 동안 유배당한 다산 정약용은 정치에서 멀어진 덕분에 경세유표,목민심서,흠흠신서 등의 탁월한 저서를 남길 수 있었다. 맑은 날 다산초당에서 멀리 아스라이 보이는 흑산도에 귀양 간,귀양길에서 헤어진 후 다시는 보지 못한 둘째 형 정약전이 그리워 사무친 마음도 책에 녹였다. 고산 윤선도는 정치에서 멀어진 덕에 보길도에 머물면서 어부사시가,오우가 등의 유명한 시가를 남겼다. 정치에서 벗어난 단순성의 결과들이다.

국가 권력을 둘러싸고 정치가 이전투구(泥田鬪狗)가 될 때 세상은 아수라장이 된다. 요즈음 한국경제를 어렵게 하고 있는 정치적 사설(辭說)이나 요설(饒舌)이 그렇다.

대중심리에 교묘하게 얹혀 그 세를 확대해 가고 있는 '국민연금 의결권 행사'와 '초과이익공유제' 등이 그런 것들이다. 이는 '사기업' 중심의 '이윤과 손실' 체제라는 시장경제의 근본을 파괴할 뿐이다. 많은 연구자들이 그러한 용어의 몰개념성을 보이기 위해 귀한 시간과 자원을 써야 하는 한,새로운 세계에 대한 우리의 지적 도전은 지체될 수밖에 없다

결국 경제 운용의 틀은 물론 사회 전체의 건강성을 해치는 정치적 사설이나 요설을 효과적으로 줄이는 방법은 정치 자체를 줄이는 방법밖에 없다. 그런데 이는 단지 행운의 영역에 속할지도 모른다.

김영용 < 전남대 교수·경제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