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족은 100만명에 불과하다. 청조는 이들에 의해 세워지고 유지됐다. 만주인 황제들이 중국 문화유산을 보호하면서 특유의 무인 기질로 강력한 지도자상을 보여 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들은 오랜 기간(1680~1770) '팍스 시니카(Pax Sinica)'의 평화와 번영을 이룩했다. 그 중심에는 7세에 제위에 올라 61년간 나라를 통치한 위대한 군주 강희제(康熙帝)가 자리하고 있었다.

순치제(順治帝)의 뒤를 이은 강희제는 소니(索尼) 숙사하 어빌룬 오보이 등 순치제 때의 비주류 인사들을 과감히 기용,정치의 기틀을 다지고 과학적인 사고와 철저한 문치를 표방하면서 중국을 다스리는 데 성공했다. 점쟁이들이 백성들의 불안감을 조성하는 예언을 못하도록 했고,온화한 남동풍이 길한 징조라는 흠천감의 말도 믿지 않았다. 대신 궁궐 안의 관측기구를 통해 불길한 조짐을 직접 알아보고,신하들에게 나쁜 징조건 좋은 징조건 함부로 상상하거나 과장하지 말고 사실 그대로를 보고하라고 명했다.

자식 복도 많아 30명의 여인에게서 56명의 자녀를 두었으며 손자들도 120여명이나 됐다. 백성들을 교화하고 질서를 바로잡고자 '성유십육조(聖諭十六條)'를 공표하기도 했다. 《청성조실록(淸聖祖實錄)》 권34에 실려 있는 것을 간단히 살펴보면 이렇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에게 복종하는 것을 존중하라 △종친들에게 관대하라 △이웃과 화목하라 △뽕나무 심기와 농업에 힘써라 △절약과 검소를 중시하라 △학교를 번창케 하라 △잡설을 근절시켜라 △법을 알려주어라 △예의와 양보의 미덕을 밝혀라 △본업에 성실하도록 힘써라 △자식들을 훈육하라 △남을 함부로 무고하지 마라 △범인을 은닉하지 말아라 △세금을 완납하라 △보갑제(保甲制)를 결성하라 △분노와 해묵은 원한을 풀어라.

그는 자국의 영토확장에도 힘을 쏟아 서역까지 세력을 확장했다. 대만을 중국에 복속시키고 남중국을 여섯 번이나 순수(巡狩)했다. 회수와 황하의 범람을 막고 운하를 통해 베이징으로 곡물을 옮기는 체제를 유지시키는 데도 적지 않은 노력을 기울였다. 대외 무역도 장려했다. 1684년부터 1757년까지 중국과 일본을 왕래했던 상선의 수가 3017척이나 됐고,중국을 방문했던 구미 각국의 상선도 312척이나 됐다.

학문이 넓고 문교(文敎)를 중시한 몇 안 되는 제왕으로 꼽히는 그는 청조의 지속적이고 영구적인 발전을 위해서는 문화사업에 공을 들여야 한다고 판단해 《강희자전(康熙字典)》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 《전당시(全唐詩)》 900권,《패문운부(佩文韻府)》 《습유(拾遺)》 556권,《연감유함(淵鑒類函)》 450권,《변자유편(騈字類編)》 240권,《전당문(全唐文)》 1000권 등 5000여권을 세상에 선보였다.

서양의 수학과 과학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예수회 선교사들의 관찰력이 한족들의 측량법보다 정확하다는 것을 알고 그들을 황실 천문대 책임자로 임명할 만큼 유연한 생각을 지녔다.

중화사상이 강한 한족과 문화적 열등감을 지닌 만주족 사이의 보이지 않는 불신과 다툼을 무마하기 위해 두 민족이 힘을 합쳐 '만한전석(滿漢全席)'이란 궁중 요리를 만들게 하기도 했다. 가히 소통 리더십의 제왕이라 할 만하다. 이 덕분에 아들 옹정제(雍正帝)와 손자 건륭제(乾隆帝)에게 권력을 순조롭게 이양하면서 강건성세(康乾盛世)란 치세를 이룩하고 중국화된 만주국가를 확고하게 구축할 수 있었다.

김원중 < 건양대 중국언어문화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