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과장&李대리] 직장 머슴, "에혀~내가 이 짓 하려고 회사 들어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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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대행도 모자라 임원 딸 과외까지…
"자네 포토샵 잘하지?"
업무시간에 슬며시 다가와 자기 딸 숙제라며 내밀기도
홍일점 "내가 식모냐"
식사배달 오면 음식 세팅, 먹고 나면 "과일 깎아라"
"자네 포토샵 잘하지?"
업무시간에 슬며시 다가와 자기 딸 숙제라며 내밀기도
홍일점 "내가 식모냐"
식사배달 오면 음식 세팅, 먹고 나면 "과일 깎아라"
종합상사 총무부에 근무하는 송모 대리(30)는 매주 두 차례 대자보 크기의 전지(全紙)와 파란색 · 빨간색 매직펜,30㎝ 플라스틱자를 놓고 씨름을 한다. 부서별 실적과 계약 진행 상황을 막대 그래프 모양으로 일일이 손으로 그려 사무실 벽에 붙여 놓는 것이다. 흡사 1970~1980년대 보험회사나 자동차회사 영업소에서나 볼 수 있는 광경이다. 원래 컴퓨터로 그래프를 만든 뒤 사절지(A3)로 출력해 붙였는데,지나가던 임원이 작아서 잘 안 보인다며 전지로 만들라고 해 수작업이 됐다는 것이다. 송 대리는 "사절지에 만들 때도 별 말 없이 다들 볼 수 있었는데 '엑셀'의 시대에 이런 '원시적인'일에 시간을 보내고 있는 나 자신을 생각하면 한심한 생각이 든다"고 푸념했다.
'우리를 슬프게 하는 직장생활' 중 빼놓을 수 없는 게 '허드렛일'이다. '내가 이런 일 하려고 열심히 공부해서 여기 들어왔나'하는 자괴감의 원천이다. 오죽했으면 '잡일'은 '雜일'이 아니라 'job일'이라는 자조어까지 생겨 났을까. 오늘도 우리 김과장 이대리들은 어떤 잡일에 시달리고 있을까.
◆상사의 가정사가 곧 나의 업무
김과장 이대리들이 가장 자존심 상하는 허드렛일은 상사의 가정사와 관련된 것들이다. 한 증권사의 홍보팀 직원들은 지난해 대학입시에서 임원의 딸이 명문대에 합격했을 때 자신이 합격한 듯한 '희열(?)'을 느꼈다고 한다. 그의 딸이 고등학교에 입학한 후부터 3년간 숙제에 필요한 자료 조사를 거들어주고,미술 실기처럼 대학 입시에 별 상관이 없는 학교 숙제는 직원들이 도맡아 해 줬다. 이 증권사 직원 이모씨(29)는 "숙제가 떨어지면 퇴근도 못하고 붙들고 있는 경우도 있었는데,자기 딸도 나중에 취직해서 똑같은 상황이 되면 기분이 좋을지 되묻고 싶다"고 꼬집었다.
웹 디자인 업체의 오모 부장은 직원에게 조카 숙제를 시켰다가 되레 낭패를 봤다. 모 대학 디자인학과 1학년생인 조카의 사진 합성 과제를 부서에서 포토샵을 가장 잘 다루는 직원에게 시키는 것까지는 좋았다. 문제는 해당 직원이 너무 열심히 해당 업무를 수행하면서 생겼다. 담당 교수가 "대학 1학년생이 할 수 있는 수준을 뛰어넘은 것으로 전문가의 도움을 받았다고밖에 볼 수 없다"며 '빵점' 처리해 버린 것.
광고회사에 다니는 손모 대리(31)는 최근 직속 상사인 김모 차장의 결혼 청첩에 도움을 줬다가 곤욕을 치렀다. 결혼을 앞둔 김 차장의 부탁으로 청첩장을 돌려주게 된 손 대리는 '김 차장에게 잘 보여야겠다'는 생각에 평소에 왕래가 거의 없던 거래처까지 일일이 찾아가 청첩장을 건넸다. 거래처로부터 축의금과 함께 화환이 쇄도한 것이 화근이 됐다. 하객으로 참석한 광고주가 "김 차장의 업계 영향력이 어느 정도길래 화환이 이렇게 많냐"고 회사에 문의해와 회사가 내사에 나서면서 결국 손 대리까지 개인 감사를 받게 됐다.
상사 가족 일을 대신하는 것을 넘어 때로는 가족의 일원이 되기도 한다. 중소 소프트웨어회사에서 일하는 김모 대리(32)는 주말마다 회사 사장집으로 '출근'한다. 기러기 아빠인 사장의 말동무가 돼 주기 위해서다. 김 대리는 올 한식에는 사장과 함께 벌초까지 다녀왔다.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시키는 대로
올해 모 회계법인에 들어온 회계사들은 입사 직후 회사 임원의 황당한 지시에 맞닥뜨렸다. "박사 논문을 쓰는 데 참조해야 한다"며 500페이지가 넘는 영문 회계 전문서적의 번역 주문이 떨어진 것.'아더메치(아니꼽고 더럽고 메스껍고 치사하다)'이지만 '계급이 깡패인 것"도 어쩔 수 없는 노릇.결국 7명의 신입 회계사들이 일주일간 업무 틈틈이 번역작업에 매달려 해당 임원의 '박사 학위'에 숨은 공로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중소 출판사에서 일하는 박모 과장(38)은 사장이 지난해 강원도 춘천의 모 대학 겸임교수가 됐을 때만 해도 '훌륭한 상사를 모시고 있다'는 생각에 뿌듯함을 느꼈다. 그러나 이런 자부심이 얼마 가지 않아 '저주'로 바뀔지는 '꿈엔들' 생각하지 못했다. 사장과 학생들의 학기 말 사은회 행사가 잡히자 박 과장에게는 춘천에서부터 서울까지 '대리 기사'임무가 맡겨졌다. 박 과장은 사은회가 진행되는 동안 주변 식당에서 혼자 밥 먹고 PC방에서 시간을 때우다 밤 12시가 넘어서야 핸들을 잡게 됐다. "뒷자리에서 곯아떨어진 사장을 보고는 일순간 '그냥 고속도로에 놓고 갈까'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
무역회사에서 일하는 정모씨(29)는 최근 사무실 안에서 과일을 집어 던지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참았다. 최근 점심시간에 정씨는 평소처럼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는 부장 이하 12명 직원들의 주문을 받아 인근 중국집에 식사를 주문하고 식탁으로 사용되는 탁자에 신문지를 깔았다. 부서 직원들이 식사를 하며 마실 물 12잔을 따르고 식사가 끝난 뒤 식기를 정리해 사무실 바깥에 내놓는 것도 정씨의 일이었다. 그런데 서둘러 일을 마친 정씨가 밀린 업무를 시작하려는 찰나 부장이 "디저트를 먹어야겠다"며 감 하나를 깎으라고 정씨의 책상에 떡하니 올려 놨다. 정씨는 "순간 화가 치밀어 올라 감을 부장의 면상에 집어 던질 뻔했다"며 "사무실에 여자직원이 하나밖에 없다보니 이런 유형의 잡일을 많이 하게 돼 '식모'로 취직한 건지 착각이 들 정도"라고 했다.
노경목/고경봉/조재희 기자 autonom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