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과학벨트) 입지를 확정,발표한 지난 16일.오후 3시 국회 한나라당 원내수석실에는 두 장으로 된 문건이 놓여 있었다. 대구 · 경북 · 울산을 지역구로 둔 의원들이 30분 뒤에 낼 공동성명서였다.

이인기 의원실이 작성한 문건에는 "정치 논리와 지역 이기주의에 밀려 공정성과 정당성을 상실한 정부의 나눠먹기식 결정에 실망과 좌절,분노를 느낀다"며 "원천 무효이며 전면 백지화하라"고 쓰여 있었다. "묵살시 650만 시 · 도민이 결집해 끝까지 대응할 것"이라는 내용도 포함됐다.

야당이 내놓은 성명서보다 더 '화끈'했다. 하지만 이 성명서는 곧 없던 일이 됐다. 이 의원실 관계자가 "아직 다른 의원들과 조율하기 전 내용으로 고쳐야 할 사항이 있다"며 양해를 구하며 다시 가져갔기 때문이다.

기자회견도 예정보다 늦은 5시께야 이뤄졌다. 논란을 거쳐 최종적으로 나온 성명서는 초안보다 많이 '톤다운'돼 있었다. '원천 무효'나 '전면 백지화'란 말은 사라졌고,대신 "정부 결정에 승복해야 나라와 미래가 좋아진다"는 문구가 들어갔다.

청와대를 직접 겨냥한 처음 성명서와는 달리 "관련 책임자에게 응분의 책임을 묻도록 하라"며 화살을 정부 쪽으로 돌렸다. "650만 시 · 도민과 끝까지 함께 대응하겠다"던 내용도 "입법권과 예산권 등의 방법"으로 바뀌었다.

이 같은 해프닝은 현재 대구 · 경북 의원들의 고민이 고스란히 투영돼 있는 것처럼 보인다. 민심을 따르자니 강경하게 나가는 게 정답이지만,내년 공천을 위해서는 정권의 기반인 TK에서 정부와 지나친 대립각을 세우는 게 옳지 않다는 판단이 작용했음직하다. 정권 핵심이 의원들에게 지나친 언급을 자제해줄 것을 당부한 것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불과 1시간30분 사이 뒤바뀐 성명서는 동남권 신공항부터 LH(한국토지주택공사) 과학벨트 등을 바라보는 현재 정치인들의 시각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들에겐 국가보다는 지역구 논리와 총선 공천이 우선이다. 이런 정치인들의 생리를 무턱대고 비난할 수 없는 것이 우리 정치의 현주소라는 점에서 안타깝다.

김재후 정치부 기자 hu@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