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은행 본점에 근무하는 김모 대리는 준수한 외모에 깔끔하게 양복을 입고 다니는 모범 행원이다. 겸손한 태도와 깍듯한 말투로 상사와 동료들에게 호감을 준다. 그러나 매년 봄이 되면 김 대리가 '무장해제'되는 날이 있다. 예비군 훈련날이다. "군복만 입으면 노상방뇨에 안하던 군것질도 하죠.짤짤이(동전 따먹기 놀이)는 또 왜그렇게 재미있는지….한번은 은행 근처에서 군복입은 채 짤짤이를 하다 평소 저를 잘 봤던 한 여직원과 마주친 적이 있었는데,그 후엔 말도 안걸더군요. "

김 대리는 군에 갔다오지 않은 여자들은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한다. 하루쯤 양복을 벗어던지고 군복을 입은 예비역들의 마음을.그 묘한 해방감에서 발동하는 장난끼를.하지만 예비군은 더 이해할 수 없다. 자신의 과거를 잊고 예비군을 무자비하게 '탄압'하는 김 부장 이 차장들을….

◆예비군의 주적은 직장상사?

예비군들에게 주적(主敵)은 북한이 아니다. 물론 그렇다고 중국이나 러시아도 아니다. 그들의 주적은 다름아닌 직장 상사다. 예비군 훈련 갔다와야 한다고 하면 부하 직원을 바라보는 직상 상사의 눈초리는 결코 따사롭지 않다.

중소 무역회사에 다니는 정모 대리도 그랬다. 그는 예비군 날짜를 몇 번이나 미뤘다. 꼭 훈련 날짜가 월말 결산과 겹쳐 도저히 동료들에게 일을 다 맡기고 훈련에 참여할 수 없었다. 그러다 "이번에도 안 나오면 검찰에 고발된다"는 최후통첩을 받았다. 그는 부장에게 조심스럽게 통지서를 내밀며 말했다. "이번에도 안 가면 벌금을 물어야 한답니다. "그러자 부장으로부터 돌아온 대답."평소에도 놀면서 또 땡땡이야.훈련을 일요일로 옮기면 안돼?" 소심한 정 대리에게 부장의 한마디는 또 하나의 멍으로 남았다.

B건설사에 갓 입사한 박모씨는 현역 시절 훈련소 교관이었다. 그는 최근 동원 예비군 훈련에서 대대장 표창을 받았다. 사격,유격훈련 모두 숙달된 조교로서의 실력을 발휘했다. 상을 받고 나니 괜한 기대심이 생겼다. 공무원들은 예비군 훈련에서 표창장을 받으면 인사 평가에 가산점이 있다는 얘기도 들은 것 같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회사에 돌아가 상사에게 표창장을 제출했다. 하지만 돌아온 건 "회사에서나 표창장을 받을 만큼 열심히 일하라"는 까칠한 반응이었다.

◆예비군의 족쇄,스마트폰

예비군들에게 스마트폰은 계륵이다. 게임,인터넷 검색,카카오톡 등으로 무료함을 달랠 수 있는 '완소품(완전 소중한 품목)'이지만,한편으론 예비군 훈련장에서도 나와 회사를 연결하는 '족쇄'이기도 하다.

"스마트폰 들고 가지?" C자동차 회사 임모 대리가 예비군 훈련에 들어간다고 하자,팀장은 스마트폰부터 챙겼다. 이메일로 해야 할 업무를 보낼 테니 놀 생각하지 말고 틈틈이 일하라는 지시였다. 막상 훈련장에 가보니 분위기가 작년과는 사뭇 달랐다. 조교들이 "훈련시간 중 스마트폰을 쓰다 걸리면 퇴소 조치한다"며 으름장을 놨다. 직장 사수와 훈련소 조교들 사이에서 난처한 입장이 된 임 대리.결국 화장실에 숨어서 업무를 봤다.

물론 예비군 훈련을 업무 회피용으로 사용하는 '뺀질이'들도 있다. D증권사의 권 모 과장은 "계속 훈련을 연기하다가 업무가 피크에 달하는 시점에 회사를 탈출하면 일종의 쾌감까지 느낀다"고 털어놨다. 그때 그에게는 솔직히 이런 심정이 든다고 한다. "그래,부장 뺑이 쳐보슈.난 야비군 훈련 갈테니…."

E보험회사의 홍 모 설계사는 예비군 훈련 때가 되면 밭에 씨를 뿌리는 농부의 마음을 갖게 된다. 수백명의 젊은 우량 고객들,남아 도는 시간,군복이 주는 은근한 동질감은 보험 판매를 위한 최적의 환경을 제공한다. 게다가 오랜만에 학교 친구나 군대 동기라도 만나는 날에는 바로 다음날 계약이 이뤄지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는 "아예 상품 설명자료와 보험 계약서를 들고 훈련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라며 "작년 가을 판매상을 탈 수 있었던 데도 예비군 훈련이 한몫했다"고 말했다.

◆내가 해병대인 걸 적들에게 알리지 마라

유통업체에 다니는 해병대 출신 이모 주임은 웬만해선 자신이 해병대를 나왔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직업상 '을'인 협력업체 직원들이 혹시라도 해병대 선임이라는 사실이 확인되면 관계가 어색해지기 때문이다. 문제는 얼마 전 예비군 훈련장에서 생겼다. 100m 밖에서도 단박에 눈에 띄는 빨간색 해병대 명찰.그동안 편하게 대해온 협력회사 직원이 그 명찰을 달고 다가오는 게 아닌가.

"주임님! 해병대셨어요? 저는 956기인데?" 이런 젠장.이 주임은 969기다. 그는 이후 펼쳐질 악몽을 떠올리며 거짓말을 한다. "난 932기다. 여기서 만나니 반갑네." 그런데 훈련이 시작할 무렵 조교가 "이곳에는 5년차 이하 예비역만 모여 있다"고 말하는 게 아닌가. 932기는 7년차.여기에 있을 수 없는 기수다. 956기 선임은 눈을 흘기며 "몇 기시죠?"라고 되물었고 이 주임은 솔직히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그날 점심식사 줄서기,아이스크림 사오기 등 잔심부름을 도맡아야 했다. 이후 이 주임은 그 협력업체 직원에게 좀체 전화를 걸지 않는다.

유창재/노경목/조재희/강유현 기자 yoocoo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