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1월 말 필자는 일본 도쿄 나리타공항에 도착했다. 일본 이화학연구소의 중이온가속기를 이용한 실험 계획이 승인돼,지도교수와 함께 연구를 수행하기 위해 난생 처음으로 외국을 방문한 것이다. 당시 필자는 결혼식을 올린 후 며칠 안 됐지만 원하던 중이온 핵반응 실험을 직접 할 수 있어 만사를 제쳐두고 연구에 참여했고, 그 실험이 박사 학위 논문의 주제가 됐다.

한국에서도 과학벨트 사업이 추진됨에 따라 꿈에 그리던 중이온 가속기가 생기게 됐다. 이젠 우리도 세계적인 연구시설을 갖게 됐다는 생각에 자긍심이 생기고,우리 후배들은 외국 시설을 빌려 쓰지 않고도 좋은 연구를 할 수 있다는 기쁨에 가슴이 뿌듯하다.

중이온 가속기가 큰 규모의 연구시설이긴 하지만,그 자체가 연구목적인 것은 아니다. 그 가속기로 어떤 연구를 수행할 수 있고,그 결과가 과학적으로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이냐 하는 게 본질적으로 중요하다.

서울을 출발해 부산까지 가려는 사람이 여러 교통수단 가운데 자기에게 가장 적합하고 경제적인 것을 선택하듯이,연구자들의 사용 목적에 적합한 가속기를 연구수단으로 선택해 설계하고 건설해야 하는 것이다.

노벨물리학상의 20%가 가속기를 이용한 연구에서 나왔을 만큼 가속기는 현대 기초과학의 중요 연구시설이다. 한국형 희귀동위원소 중이온 가속기인 'KoRIA(Korea Rare Isotope Accelerator)'는 세계 최초로 온라인 동위원소 분리방식(ISOL · Isotope Separator On-Line)에 비행 입사빔 분열 방식(IFF · In-Flight Fragmentation)을 연계함으로써 세계에서 가장 희귀한 동위원소를 가장 높은 강도로 만들 수 있는 독창성을 가지고 있다.

앞으로 KoRIA가 본격적으로 가동에 들어가게 되고,이를 이용해 원자번호 114번 이상의 신원소를 발견하거나 그래핀을 능가하는 신물질 소재를 합성하게 되면,이런 결과들이 노벨상을 받을 만한 수준의 연구 성과가 됨으로써 우리나라의 국격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결과가 중이온 가속기를 설치하기만 하면 저절로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에도 이미 KoRIA와 유사한 외국의 중이온 가속기 시설을 이용해 연구를 수행하고 있는,노벨상에 근접한 연구자들이 있으므로 이들을 중심으로 첨단의 연구를 수행할 수 있는 인프라를 형성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세계 최고 수준의 KoRIA를 건설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외국에만 의존하게 되면 고유의 활용연구를 수행하는 데 부적합한 시설이 될 수 있다. 우리 우수 연구자들을 중심으로 국내 연구자들이 합심해 추진하면서 선진국과 공동 연구로 도움을 받는 방향으로 추진해야 한다. 효율적인 운영을 위해 참여 연구원 모두의 노력과 헌신을 결집할 수 있는 집단연구체제로 수행해야 하며,개인 연구와 같이 일부가 독주하는 방식을 버리지 못한다면 결코 성공할 수 없다.

또 중요한 점은 국가 차원의 지속적인 지원과 정치권의 도움이 없이는 성공할 수 없다는 점이다. 정부에서는 과학자들이 최선의 노력을 경주해 사심 없이 연구에 전념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기초연구에 적합한 평가체제 도입을 지원해 주어야 한다. 과학자가 정치를 하지 않도록 정치가의 도움도 필요하다. 기초과학의 연구 성과는 단기간에 얻어지는 것이 아니므로 이에 대한 국민적인 이해도 필요하다고 본다.

과학계에 대한 특별한 배려가 없었다면 과학비즈니스벨트 사업을 추진하도록 결정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제 국가 과학 역량을 집결할 수 있는 첫 단추는 꿰어졌다. 남은 것은 과학자들이 정치적으로 좌고우면하지 않고 연구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국민의 지원과 관심으로 토대를 만들어주는 것이다.

김용균 < 한양대 원자력 공학 교수 / 객원논설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