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전은 나의 운명
家業 벗어던지고 유통업 진출…본궤도 올리자 다시 제약사로
가장 한국적인 다국적 제약사
6년만에 매출 5배로 키워…동아제약과 '공동영업 실험'
첼로 켜는 CEO
악기 연주와 회사 경영은 닮아…피아노 전공한 부인과 협주도
토종 제약사의 세계화
합쳐서 크게 만들어 나가든지…글로컬라이제이션이 살 길
국내 중견 제약사의 2세 경영인 자리를 박차고 나와 다른 제약사의 월급쟁이 사장이 됐고,지금은 다국적 제약사 글락소스미스클라인(GSK)의 전 세계 114개국 현지법인 대표 가운데 유일하게 15년간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는 전문경영인.지난해 GSK가 국내 제약업계 1위인 동아제약 지분 9.91%를 취득한 이후 외국계 제약사 대표이면서 동시에 동아제약 등기이사 명함을 함께 갖고 다니는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업계의 한 원로 최고경영자(CEO)는 "불꽃만으로 이뤄진,타고 남은 재라고는 하나도 남길 것 같지 않은 이"라고 했다.
김진호 GSK코리아 대표(61)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는 '정글과 다름 없다'는 제약업계에서 GSK코리아를 열정과 근성으로 다져진,가장 한국적인 다국적 제약사로 키워냈다. 그는 최근 내수 시장의 한계에 봉착한 국내 제약업계에 세계화(Globalization)와 현지화(Localization)가 합쳐진 '글로컬라이제이션(Glocalization)'을 제시하며 "(해외 진출은)아직 늦지 않았다. 세계는 너무나 넓다"고 역설하고 있다. 세계 각국의 기업문화를 존중하는 방식으로 세계화를 추구하면 세계시장 진출이란 국내 제약사의 숙제를 풀수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무대가 좁다면 스스로 무대를 만들어라"
김 대표는 영진약품 창업주인 고(故) 김생기 회장의 차남으로 1985~1991년 영진약품 대표이사를 지냈다. 영진약품은 당시 '구론산바몬드'로 동아제약의 '박카스',일양약품의 '원비디'와 함께 '드링크제 전성시대'를 이끌었다. 매출 규모도 업계 2~3위권의 큰 회사였다. 그러나 그는 40대 초반의 나이에 2세 경영인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조심스럽게 아버지 회사를 박차고 나온 이유를 물었더니 돌아온 답변은 의외로 간단했다. "그때는 젊음이 넘쳐서 다양한 것을 하고 싶었다. " 당시 그는 외국에서 화장품을 들여와 팔았는데,이게 아버지의 뜻과 맞지 않았다. 아버지는 안정을 추구했고,패기 넘치던 김 대표는 도전을 즐겼다. 김 대표는 고민끝에 '출가'를 결심했다.
그는 가업(家業)을 벗어던지고 유통업에 손을 댔다. 적잖은 빚을 내서 회사를 차린 다음 '스내플'이라는 음료를 수입해 당시 시장이 커지고 있던 편의점에 납품했다. 또 국내 농가의 쇠고기 생산이 한계에 부딪힐 것으로 보고 쇠고기를 수입해 팔았다. 이런 사업 아이템들은 당시로서는 새로운 시도였고 사업이 잘 돼 빚도 다 갚았다. 사업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을 때쯤 그는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1997년 GSK의 전신인 글락소웰컴 한국지사장을 맡아달라는 제의를 받아들인 것이다. 김 대표는 "지사장의 자율성을 보장해 준다는 점에 끌렸다. 단순한 관리자였다면 맡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가업을 떠나 외국계 제약사 사장이 된 아들을 아버지는 어떻게 생각했을까. "무척이나 섭섭해하셨다고 들었다. 무릎 꿇고 들어오길 바랐을 테고…,그때 '질병과의 싸움'이 내게 주어진 사명이라고 생각했고 회사의 국적을 떠나 이 사명을 완성하고 싶었다. "
외국계 회사의 한국지사 대표가 됐을 때,현재 GSK글로벌 회장이 된 앤드루 위티 당시 아시아 · 태평양 지역 사장의 요청으로 부친과 식사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식사 자리를 끝내고 나온 아버지는 "너랑 잘 어울리겠다"고 딱 한 마디만 했다. 김 대표는 "그 이후 2009년 4월 돌아가실 때까지 별 다른 말씀이 없었다. 그런데 돌아가시기 얼마 전 아내한테 '내조 잘했다'고 하셨다더라.외교적으로 칭찬해주신 거지"라고 말했다.
◆국내 제약사의 세계화 성공모델 견인
앤드루 위티 사장은 권한 이양과 책임 할당이 분명한 서구적 리더십의 소유자로 김 대표와 죽이 잘 맞았다. 이후 김 대표는 승승장구했다. 오랫동안 적자로 허덕이던 한국법인을 입사 2년 만에 흑자로 전환시켰고 매출은 6년 만에 5배로 키웠다. 부임 당시 GSK코리아의 매출은 350억원,직원은 200명 정도였다. 지난해 이 회사의 매출은 4650억원,직원은 700명으로 늘었다. 전체 국내 진출 외국계 제약사 중 1위다. 전 세계 GSK지사 중 성장률이 가장 높다. 다국적 제약사의 한국지사 대표가 한국인인 경우도 드물지만 15년 동안 같은 자리를 지키는 것은 더욱 드문 일이다.
그에게 국내 제약업계의 과제를 물었다. 업계는 최근 의료계 리베이트에 대한 전방위 조사로 변곡점을 맞고 있다.
김 대표는 "우리 제약사들이 지름길을 찾아야 한다. 합쳐서 크게 만들어 (컨소시엄을 형성해 해외로)진출하든지 아니면 글로벌화된 제약사를 통해 나가는 방법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토종 제약사들의 글로벌화를 확신하기 때문일까. GSK는 동아제약과 지난해 5월 공동사업부 신설을 내용으로 한 포괄적 사업 제휴를 체결했다. 외국계 제약사가 국내사 지분을 인수하고 새로운 조직을 만들어 공동 영업을 하는 '동거실험'은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시도다. 공동사업부는 올해부터 본격 가동에 들어갔다.
동아제약과의 제휴는 기본적으로 비즈니스이지만 한국 제약산업 세계화에 도움을 주고 싶은 김 대표의 개인적 바람도 크게 작용했다. 그는 "당장은 동아제약 제품의 해외 진출을 돕고 중장기적으로 국내 업체들이 글로벌 제약사의 임상시험 인프라를 활용해 세계로 진출하는 가교 역할을 하고 싶다"고 피력했다.
◆'나눔 경영' 첼로 켜는 CEO
김 대표는 경복고 2학년 때인 1967년 학교축제 때 두 번이나 무대에 올랐다. 한 번은 베이스기타를,또 한 번은 첼로를 들었다. 공부하기에도 바쁜 고교시절 두 개의 악기를 연주하며 축제무대에 뛰어올라갔던 학생은 지금도 '첼로 켜는 CEO'로 불린다. 그는 해외 출장을 가지 않을 때면 집에서 어김 없이 첼로를 연주한다. 피아노를 전공한 부인과 하나의 곡을 놓고 서로 '싸우면서' 연주하는 맛도 쏠쏠하다. 몸이 열 개라도 모자라는 CEO가 악기 연주라는 감성적인 취미생활에 빠져도 괜찮을까. 김 대표는 "악기 연주가 비즈니스에 도움이 된다. 지휘자가 오케스트라의 각 파트를 조화시키고 때로는 강하게,때로는 자유롭게,변화무쌍한 모습으로 이끄는 것처럼 CEO도 그런 모습으로 회사를 조율하고 이끌어야 한다"고 말했다. 김 대표의 기질에 따라 GSK코리아의 '토착화' 노력에도 음악이 깊이 관여돼있다. 특히 음악을 통한 사회공헌 활동은 GSK의 존재감을 높였다는 평가다. 지난 10년 동안 'B형 간염퇴치를 위한 바이올리니스트 강동석의 희망콘서트'는 음악을 통한 사회공헌 활동의 개념을 국내에 착근시킨 사례로 꼽힌다. 콘서트 얘기가 나오자 김 대표는 소망 한 가지를 털어놓는다. 그는 "살아 생전에 북한 땅이나 비무장지대(DMZ)에서 클래식과 록,국악이 한데 어우러진 평화콘서트를 꼭 열고 싶다"고 말했다.
이준혁 기자 rainbo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