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주인이 나타나면 좋겠지만…." 권오철 하이닉스반도체 사장(53)은 다음달 중순으로 예정된 하이닉스 매각공고 얘기를 꺼내자 그저 웃었다.

"2008년 이후부터 꼽아도 매각이 공식적으로 거론된 것만 세 번째입니다"라고 말했다. 하이닉스는 기업들이 사업구조 재편을 위해 대형 인수 · 합병(M&A) 얘기를 꺼낼 때마다 물망에 오르내린다. 2001년 채권단이 대주주가 된 이후부터 따지면 10년간 매물 상태다. 하지만 수조원대의 설비 투자가 필요한 반도체 사업의 특성상 누구도 선뜻 나서지 않아 지금껏 '주인 없는 기업'으로 남아 있다.

권 사장을 23일 저녁 한양대의 한 강의실에서 만났다. 그는 이날 공대생들을 대상으로 '메모리 신성장시대와 하이닉스반도체'라는 주제로 2시간 동안 강연했다. 마침 하이닉스 노사는 이날 통상 임금을 4.9% 인상하기로 합의하고 상호 신뢰하고 존중하는 협력적 노사 문화를 가꿔가기 위한 공동실천 선언식을 가졌다.

◆10년간 계속되는 주인찾기

권 사장은 담담한 표정으로 과거 이야기부터 꺼냈다. 1984년 현대그룹에 입사한 권 사장은 1999년 반도체 빅딜을 담당한 실무자였다. 당시 빅딜로 LG반도체와 현대전자가 합쳐져 지금의 하이닉스가 됐다.

합병 후 상황은 되레 나빠졌다. 대규모 시설 투자에 따른 부채 증가와 반도체 시황 악화 등으로 채무 조정을 해야 했다. 주인 자리가 비어있었던 것은 그 때부터였다.

하이닉스는 2001년 채무 조정을 거치며 대주주협의회가 85% 지분을 보유하게 됐다. 주주협의회 지분은 이제 15%로 줄었지만 우리은행(3.3%) 정책금융공사(2.6%) 신한은행(2.5%) 등은 여전히 주요 주주다. 2009년 여름 처음으로 효성이 하이닉스 인수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시장 반응은 냉담했다.

권 사장에게 뚜렷한 지배주주가 없는 '포스코' 형태로 남는 것은 어떠냐고 물었다. 그는 "사업의 특성과 한국적 문화를 고려할 때 포스코식으로 가는 게 유효한 것인지 모르겠다"고 조심스러워했다. 또 "주인이 있는 게 좋은 건지,아닌지 인위적으로 답하기 어렵다"고 덧붙였다.

권 사장은 "좋은 주인,훌륭한 주인이 하이닉스의 소유권을 확보하고 장기적으로 육성하는 것은 좋은 일"이라면서도 "그런 좋은 주인이 안 나타난다고 해서 대단히 실망할 일도 아니다"라는 말도 했다.

◆하이닉스의 자산은 '사람'

권 사장은 "어디가 주인이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회사가 자생적으로 지속 성장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매각 전제를 달았다. 그러면서 "미국 회사들은 특정 주주가 장기 집권하기보다는 퍼블릭(시장)이 사실상 지배하는 구조이지만 우리는 특정인이 지배하는 것이 더 효율적인 구조로 여기는 것 같다"고 했다. 매각이 쉽지 않은 정황을 감안한 얘기로 들렸다.

권 사장은 요즘 대학가를 돌며 강연에 몰두하고 있다. "지난 수년간 이어진 반도체 업계의 치킨게임(생존 경쟁)이 끝나면서 D램과 낸드플래시 업체 5곳만이 살아남은 '빅5의 경쟁시대'가 됐고 결국 '인재' 확보가 무엇보다 중요해졌기 때문"이라고 했다. D램 업체인 일본 엘피다가 20나노급 기술 개발에 성공했다고 발표하면서 업체 간 긴장도가 높아진 것도 대학가를 향하는 그의 발걸음을 재촉한다고 소개했다.

권 사장은 "엘피다가 과연 20나노 공정을 제대로 할 수 있을지 지켜봐야 할 것"이라며 "기술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회사만이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말했다. 기술한계 극복을 풀기 위한 하이닉스만의 해법으로 '사람'을 꼽았다.

"인생을 바쳐 열심히 일해온 엔지니어들이 하이닉스를 다시 일으켰고 앞으로 열심히 일해줄 우수한 일꾼들 없이는 숱한 난제를 풀수가 없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지난해부터 현장에 강한 인재를 뽑기 위해 대학교를 돌고 있다. 이런 노력 덕분인지 올 상반기 하이닉스의 200명 공채에 1만4000여명에 가까운 지원자들이 몰렸다.

권 사장은 "올 하반기에 낸드플래시와 D램 모두 20나노급을 개발하고 내년에 양산에 들어갈 예정이지만 앞으로 20나노에서 몇세대를 더 나갈 수 있을지는 불투명하다"고 했다. 그는 "메모리반도체는 하이닉스의 출발에 불과하다"며 "기술과 제품,수익성,종업원의 생산성 등 모든 면에서 세계 최고의 기량을 갖추겠다"고 다짐했다.

김현예 기자 yea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