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나라를 창업한 난세의 영웅 조조와 제국의 몰락을 앞당긴 제왕 조예(曹叡) 사이에는 우여곡절 끝에 제위에 올랐지만 요절한 '수성의 제왕' 조비가 있다.

진수의 정사 《삼국지》의 '문제기(文帝紀)'에 의하면 위나라 문제(文帝)는 휘를 비(丕)라 하고 자를 자환(子桓)이라 했다. 조조의 쫓겨난 본처 정부인(丁夫人)의 뒤를 이어 가기(歌妓) 출신으로 황후에 오른 무선변황후(武宣卞皇后)의 맏아들이다. 후한(後漢) 영제 중평(中平) 4년인 187년 겨울 초현에서 태어났다. 조비가 태어날 때 푸른색 운기(雲氣)가 둥근 모양으로 수레 덮개처럼 걸쳐 있다가 하루 만에 없어졌는데,이것을 본 사람들은 지극히 존귀한 거목이 탄생한 증거라고 생각했다.

조비는 나이 여덟에 이미 글을 잘 지었고 재주가 뛰어나 경전과 제자백가 서적을 두루 꿰뚫었다. 또 말타기와 활쏘기에도 뛰어났고 검술을 좋아했다. 여러 자식을 두고 있던 아버지 조조는 그러나 맏아들인 조비보다 막내인 조식을 후계자로 점찍어 두었다.

건안 13년(208년)에 한수와 마초를 무찌른 공으로 오관중랑장이 된 조비는 조식과 제위 계승 문제를 놓고 보이지 않는 내부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그런 조비에게 관도대전의 일등공신인 가후가 이렇게 말했다. "바라건대 장군께서는 인덕과 관용을 발휘하고 숭상하며,평범한 선비의 업을 행하고,아침부터 저녁까지 바쁘게 하며,아들의 도리를 그르치지 않으면 됩니다. "(삼국지 가후전)

조비는 가후의 가르침에 따라 은인자중하며 때를 기다렸다. 조조의 신임을 받는 가후는 결국 조조에게 원소와 유표를 거론하며 그들의 멸망 원인이 후계자 문제에 있다는 말을 건의해 조비를 후계자로 지명토록 했다.

당시 저명한 관상가 고원려(高元呂)의 평에 따르면 조비는 나이 마흔이 고비일 만큼 단명의 상을 타고났다. 그는 고원려의 말을 믿고 고뇌하는 아버지 조조 때문에 정신적인 갈등을 겪고 있었다.

위왕(魏王)이 된 조비는 어진 정치를 했다. 아랫사람들의 의견을 듣고 법규와 제도에 따른 정치를 하고,사대부들에게는 육예(六藝)를 잘 살펴보라고 했다. 심지어 출정했다 사망한 병사들을 위해 작고 얇은 관을 만들었고,전사한 유해를 집으로 보내 장례와 제사를 지내도록 영을 내리기도 했다.

권력을 잡고 있던 그는 33세의 나이로 헌제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올라 한나라 조정의 역법을 계승하면서 순조롭게 권력을 승계했다. 점진적으로 개혁 마인드를 구축한 그는 인구 10만명당 1명을 효렴이란 벼슬에 추천하도록 한 제도에 얽매이지 말고 우수한 인재를 활용하라고 명했다. 당시 거들떠보지 않던 성현 공자를 위해 제사를 받들도록 하기도 하고,서역의 국가들을 두루 포용하는 정책을 추진하고 교역도 활발하게 했다.

그는 특히 집안 관리에 엄격했다. 부인이 정치에 관여하는 것은 혼란의 근본이 된다며 모든 신하에게도 태후에게 나랏일을 상주하지 말라고 했다. 황후 일족도 조정의 요직을 보좌하는 임무를 맡을 수 없게 했다. 자신이 죽으면 안장하지 말고 식물들이 살 수 없는 척박한 땅에 묻어 후대들도 장소를 알아보지 못하게 하고,무덤 안에 어떤 패물도 넣지 말라는 명을 내렸다.

나이 마흔에 세상을 떠난 조비는 문학을 애호하고 저술에 힘썼다. 그가 지은 작품은 100편에 이를 정도로 인문학적 소양이 풍부했다. 그러나 친동생 조식뿐만 아니라 주위 인물까지 정치적으로 탄압하는 등 자신의 신상과 관련된 문제에 대해서는 냉철함을 잃고 범인(凡人)과 다를 바 없는 면모를 보였다. 진수는 "조비가 좀 더 도량 있고 공평한 마음 씀씀이를 갖고 있었다면 현명한 제왕이 되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제왕을 꿈꾸는 자라면 반드시 새겨 두어야 할 말이다.

김원중 < 건양대 중국언어문화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