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랜드 외딴 지역의 농부들 사이에는, 계약을 확인하는 전통적인 방법이 전해져 오고 있다고 한다. 그들은 손에다 침을 뱉고 문지른 후, 악수를 하는 것으로 거래를 확인한다. 그렇게 한 번 내뱉은 말은 곧 계약이 되는 것이며, 그들에게 이를 증명해 줄 변호사는 필요치 않다. 서로의 신뢰와 존중이 계약을 지켜주기 때문이다.


만 엔짜리 일본지폐에는 일본 근대화의 선각자로 양학(洋學)의 중요성을 외쳤던 사람의 초상화가 있다. 그는 후쿠자와 유키치라는 사람으로 게이오(慶應) 대학을 설립한 사람이기도 하다. 메이지 유신 1년 전인 1867년, 후쿠자와 유키치는 돈을 들고 어느 집 문을 두드렸다. 구두로 계약했고 오늘이 집값을 지급하는 날이니 받으라고 하면서. 그때는 관군과의 전쟁으로 많은 에도사람들이 피난을 가는 통에 집값이 별 의미가 없었던 상황이었다. 대리인은 “아무리 약속은 했다지만 이런 난리 중에 집값을 지불하는 사람이 어디 있나요”하며 핀잔을 주었다.


하지만 그는 말했다. “나는 이미 집을 사겠다고 약속했다. 변란이 일어나면 약속을 파기하거나 가격을 깎는다고 약속한 바 없다. 사람과 사람이 말로 약속한 것이 가장 확실한 증거다. 나도 이 집을 사더라도 혼란 때문에 살지 못하고 대피해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약속한 이 돈은 꼭 지불해야 한다.”


재테크하는 사람이 이 이야기를 듣는다면 그를 똑똑했다고 말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계약서도 안 썼고 얼마든지 조정이 가능한데 약속한 가격을 다 지불하는 것은 고지식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자기가 한 약속에 책임을 지고 싶었다. 약속을 지키는데 전쟁 같은 상황은 그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미생의 약속을 두고(尾生之信) 우직하고 어리석다고 말한다. 부득이한 경우에는 약속을 지키지 못할 수도 있고 미룰 수도 있지 않느냐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오히려 고지식하더라도 자기 말에 끝까지 책임을 지려는 사람이 진정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닐까.


믿음이란 사람(人)의 말(言)을 뜻한다. 그래서 신뢰는 말 한마디면 족하다. 서류를 작성해야만 형성되는 것이 아니며, 돈이 오고가야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다. 한 번 내뱉은 말을 상황이 유리하다고 번복하거나 없던 일로 하는 것은, 돈은 벌수는 있어도 신뢰는 얻을 수 없다. 약속을 하면 신뢰는 이미 형성된 것이다.


어느 기업인의 얘기다. 한 때 외상대금이 회수가 안 돼 고생할 때, 자기 회사의 자금사정이 안 좋다는 소문과 부도설마저 업계에 퍼졌다고 한다. 그러자 여러 거래처에서 납품을 거절하고 외상으로 받은 물품대금을 요구해 왔다. 여기저기 자금을 구하던 차에 대만의 거래처로부터 연락이 왔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소식을 들었다며 얼마가 필요한지 도와주겠다고 한 것이다. 아무런 조건도 없이 무상으로 필요한 자금을 빌려주겠다며, 돈을 보내와 그 고비를 무사히 넘겼다.


그 기업인은 지금까지 신용하나로 살아왔는데 그 신용도 상황이 바뀌니 소용없다며 한탄했다. 오히려 외상대금을 회수하려는 국내기업과 달리 도움을 청하지 않았는데도 기꺼이 도와주는 중국 상인을 보고 신용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경영이 정상화되어 돈을 갚으려 할 때 그 중국 상인은 “나중에 내가 사업에 어려움을 있을 때 그 때 갚으라”며 받지 않았다고 한다.


세상인심이란 자기 마음 같지 않다. 믿음이란 인간적이어서 변할 수 있다. 자신이 어려울 때 여전히 함께 해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슬그머니 발을 빼는 사람이 있다. 그럼에도 전쟁 중에 대금을 지불하고, 해외 거래처로부터 영수증도 없이 큰 자금을 선뜻 빌릴 수 있었던 것은 언제나 한결같이 신용을 지켜왔기 때문이 아닐까.


눈이 온 뒤에야 송백(松柏)의 지조를 알 수 있다고 했다. 시련을 겪은 후에야 그 사람의 신의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신의로 인해 때로는 금전적 손해를 보는 듯해도 인생을 살다보면 결코 마이너스가 되지는 않는다. 마이너스는 오히려 믿음이 부족할 때 생긴다. (hooam.com/whoim.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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