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남의 대표적 저층 재건축 단지인 개포주공1단지(5층) 조합원들이 최근 조합장을 새로 뽑았다. 신임 조합장은 서울대 법대 출신의 박치범 변호사(44 · 사진)다. 조합과 비상대책위원회 간 법정 다툼으로 조합장 업무가 정지됐을 때 법원이 직권으로 변호사를 임시 조합장에 임명한 사례는 있으나 변호사 스스로 출마해 조합장으로 당선된 것은 박 변호사가 처음이다.

◆조합장의 가시밭길

개포주공1단지는 조합원 수 5040명에 자산 규모만 5조원에 이르는 초대형 사업장이다. 조합장 자리를 차지하려고 수년간 공을 들여온 이들이 여럿 있었다. 선거에는 박 변호사 등 5명이 입후보했다.

다른 후보와 비교하면 박 변호사는 무명 수준이었다. 지지 기반이 없어 후보추천서 200장을 모으기조차 쉽지 않았다. 조합원 방문으로는 힘들다고 판단한 그는 우편 발송과 회수로 어렵게 입후보에 필요한 추천서를 받아냈다.

선후배 변호사 등 주변에선 후보 사퇴권유로 그의 마음을 흔들었다. "돈도 되지 않는 구정물에 왜 발을 담그려고 하느냐"는 선배의 만류에 밤 늦게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기도 했다.

선거운동 막바지엔 악의적인 비방에 시달렸다. "월급 2000만원을 받는 변호사가 350만원을 받는 조합장을 하려는 데엔 뭔가 다른 의도가 있을 것"이란 유인물이 뿌려졌다.

박 변호사는 불리한 상황에서도 2차 투표까지 가는 접전 끝에 조합장으로 선출됐다. 그는 선거 승리 요인으로 '투명한 재건축 추진을 바라는 조합원들의 간절한 소망'을 들었다.

◆"재건축 모범사례 만들겠다"

재건축 · 재개발 사업은 '비리의 온상'으로 꼽힌다. 재건축을 마친 강남권 아파트 단지에선 조합 임원이 구속되지 않은 곳을 찾기 힘들 정도다. 개포주공1단지 전 조합장도 비리 혐의로 구속됐다.

박 변호사는 "조합장이 비정상적인 자금을 받는 순간부터 시공비 협상 등에서 건설사에 끌려다닐 수밖에 없다"며 "조합 집행부가 깨끗해야 싼 값에 좋은 아파트를 지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자금 입출금 내역과 계약사항을 조합 홈페이지에 낱낱이 공개할 예정이다. 모든 회의마다 회의록을 작성하고 주요 회의는 동영상으로 찍어 홈페이지에 올리기로 했다. 시공사와 접촉할 땐 사전에 공지하고 결과를 조합원들에게 알릴 방침이다.

박 변호사가 조합장 출마를 결심한 것은 전문성 강화를 위해서다. 그는 "사업을 제대로 이해하고 네트워크도 갖춰야 차별화된 재건축 전문변호사가 될 수 있다"며 "당장은 힘들겠지만 발전 가능한 길을 택했다"고 말했다.
그는 "시공비와 사업비 거품을 걷어낸 모범사례를 만들어 재건축 · 재개발 시장이 투명해지는 데 일조하고 싶다"는 포부도 밝혔다.

조합원들은 신임 조합장에 기대감을 나타냈다. 한 조합원은 "서울대 법대를 나온 변호사가 비리에 연루되면 지금까지 이룬 모든 것을 잃게 된다"며 "사업을 투명하게 이끌어 재건축 역사에 이정표를 세울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조성근/박한신 기자 trut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