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왕의 남자니,정권 실세니 하는 짐을 벗고 정치인 이재오로서 얘기하겠다. " 이재오 특임장관은 1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열린 한경밀레니엄포럼에서 작심을 한 듯 현안에 대한 견해를 쏟아냈다. 양복 재킷까지 벗었다. 지난 '4 · 27 재 · 보선'에서 여당이 패배한 이후 정치적 언급을 자제하던 모습과는 완전히 달랐다. 최대 이슈로 떠오른 저축은행 사태에 대해 전 · 현 정권을 막론하고 책임론을 거론하는 등 공세적 자세를 보였다. 이 장관은 이날 저축은행 사태 외에 정치 개혁,개헌,남북한 문제,경제 현안 등에 대해서도 거침없는 의견을 내놨다.

▼전삼현 숭실대 법학과 교수=저축은행 사태는 시스템의 문제 같다.

▼이 장관=권력형 비리와 토착비리가 섞인 전형이다. 부패의 표본이다. 내각의 운명을 걸고 저축은행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앞으로 관련 제도를 어떻게 바꿔야 하는지 검토해야 한다. 부패가 청산되지 않으면 1인당 국민소득(GNI) 3만달러 시대로 가지 못한다. 이런 상황에서 복지가 웬말인가. 사회적 갈등 비용이 매년 300조원이 든다고 한다. 부패와 갈등을 줄이는 것이 최고의 복지다. 근본을 치유하지 않은 채 한정된 재원으로 복지에 접근하려고 하니까 안 되는 거다.

▼정규재 한국경제신문 논설실장(사회)=저축은행 사태가 정치 투쟁으로 발전할 것 같은가.

▼이 장관=전 정권,현 정권 어느 쪽이 더 책임이 있는 게 아니라 부실이 이뤄지기까지의 (전 정권) 책임,부실을 묵인한 (현정권) 책임을 공정하게 물어야 한다. 저축은행 사태가 빚어지고 부패가 저질러지는 과정이 지난 정부와 밀접하므로 지난 정부 관계자들에게 법적 · 도덕적 책임을 물어야 한다. 또 부실을 알고도 방치한 현 정권 관련자가 있다면 그대로 책임을 물어야 한다. 청와대와 야당이 정치 투쟁을 할 만한 사안은 아니다.

▼정 실장=저축은행 문제는 현 정부의 (서민정책) 기조와도 어긋나는 것 같다.

▼이 장관=우리 정부는 '친(親) 서민사회'를 지향한다. 저축은행 사태는 전혀 서민적이지 않은 문제다. 공정사회와도 맞지 않다. 저축은행들은 '이자를 더 준다'며 서민을 유혹했다. 저축은행 사태를 계기로 정치개혁과 청렴의 원년을 만들어야 한다. 국세청과 감사원,금융감독원 직원이 연루된 것은 그들이 공직기강을 잡아야 할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우리 공직 사회의 부패가 어느 정도 심각한지를 보여줬다. 큰 아픔을 딛고 변혁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이상만 중앙대 경제학과 교수=개헌의 필요성에 대해 강조해 왔다.

▼이 장관=개헌은 무조건 해야 한다. 국민소득 3만달러 이상인 전 세계 24개국 중에 대통령제를 채택한 국가는 없다. 부정부패가 만연한 상위 100위권 내 나라들 중에 78개국이 대통령제를 운영하고 있다. 선진국들은 국민소득 3만달러를 넘으면 자연스럽게 권력도 분산시킨다. 우리도 이래야 한다. 대통령은 국방 외교 대북정책 등 '큰 그림'만 맡고 국내 정치의 잘잘못은 내각이 책임지는 게 맞다.

▼이 교수=당장 해결해야 하는 굵직한 이슈들이 많은데 꼭 지금 개헌을 해야 할까.

▼이 장관=우리는 모든 잘못을 대통령에게 돌린다. 5년 단임제를 채택하니까 역사상 성공한 대통령이 안 나오는 거다. 권력이 분산돼야 부정부패도 없어진다. 개헌 논의야 여야가 합의만 한다면 90일이면 끝난다. 왜 안된다고만 보는가.


▼이 교수=3일 이명박 대통령이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를 만난다.

▼이 장관=박 전 대표가 지난달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유럽 순방을 다녀온 것을 보고하기 위해서다. 그 이상도,이하도 아니다. 정치적 의미를 부여하지 말아 달라.정치적으로 보려고 하면 한나라당에 큰 혼란을 가져온다. 의미를 둘 필요는 없다.

▼권기찬 웨어펀인터내셔널 회장=이 장관이야말로 갈등의 중심에 서 왔던 인물 아닌가.

▼이 장관=한국 정치에서 '주류'에 서지 못했다. 광부의 아들로 태어나 대학 시절 학생운동을 하면서 파란만장한 길을 걸었고,야당 정치인으로 10년 살았다. 야당이 공격하는 것에 대해 할 말은 없다. 나도 과거엔 앞장서서 공격했으니까. 내가 입을 열면 무조건 이 대통령과 연관짓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국무위원이다. 국무위원으로서 다른 생각을 갖는 것은 정치적으로도 옳지 못하다. 앞으로는 '갈등의 중심'에 서지 않도록 처신을 잘할 거다.

▼이경태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연구원장=23평짜리 단독주택에 살면서 지하철을 타고 다니는 점을 많이 강조하는 것 같다.

▼이 장관=다들 안 믿는 눈치더라.'강남에 빌딩 한두 채쯤은 있겠지'라고 여기는 것 같다. 자랑할 일도,그렇다고 부끄러워 할 것도 없다. 다만 내가 23평짜리 집에서 쭈그려 앉아 있는 모습을 아들이 보는 건 아버지 된 도리로서 마음에 걸린다. 공직자는 '청부(淸富)'도 안 된다. '청빈(淸貧)'이 맞다. 정치인이 월급을 받아 집을 사고 땅을 사는 게 가능한가. 공직자는 국민에게 무한 봉사해야 한다.

▼이만우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정권 말 민심 이탈이 심각하다. '4대강 사업'에 대한 국민 여론도 좋지 않다.

▼이 장관=잘 알고 있다. 4대강 이슈에 대한 홍보와 설득이 부족했다는 것은 인정한다.

▼김주현 현대경제연구원 원장=정부의 대북 정책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 장관=북한 내부 상황이 좋지 않으니까 김정일이 답답한 마음에 중국에 갔던 것으로 분석된다.

▼김 원장=역대 대통령들 중에는 정권 말에 당적을 이탈하는 사례가 있었다.

▼이 장관=이 대통령은 끝까지 책임지는 모습을 보일 것이다. 과거의 당적 이탈 전례를 답습하는 것은 무책임하고 비겁한 자세다. 나 역시 한나라당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분당(分黨)은 있을 수 없다.

▼황영기 차바이오앤 회장=권력과 기업 간의 권력 유착은 여전히 심하다.

▼이 장관=정경분리는 꼭 이뤄야 한다. 정치인이 기업으로부터 돈 받아 쓰고 그만큼 기업에 특혜를 주는 일은 근절돼야 한다. 기업이 어떤 이유로든 권력에 돈을 쓰면 안 된다. 기업이 돈을 주지 않는다고 불이익을 주는 권력도 있어서는 안 된다.

▼정 실장=이 대통령의 국정운영에 대해 점수를 매긴다면.

▼이 장관=못하는 건 아니다. 내가 평가하면 점수가 후할 수밖에 없지 않겠나. 이번 정권이 성공하는 게 내 정치적 목표다.

정리=김정은/김우섭 기자 likesmil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