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아줌마형 인맥' 만들기
일본에서 할아버지에게 "누구랑 같이 놀러가겠느냐?"고 물어보면 거의 대부분이 할머니와 가고 싶다고 한다. 그런데 할머니에게 똑같은 질문을 하면 정반대로 거의 다 친구랑 놀러가지 할아버지랑 가기 싫다고 한다. 가족 먹여 살리겠다고 평생을 뛰었는데 직장을 그만두니 아내에게서까지 '왕따' 당하는 것이다.

이 같은 씁쓸한 일본 이야기는 중년에 들어선 우리 베이비붐 세대에게 남의 일 같지 않다. 요즘 같은 노령화시대에 대개 쉰 중반에 직장 문을 나서면 이삼십 년을 더 지내야 한다.

노후를 보내는 인생 선배들을 보면 대개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은퇴 후 남은 인생을 '여생(餘生)'으로 여기며 허전히 사는 사람과 제2의 인생을 활기차게 즐기는 사람이다.

전자는 과거의 덫에 발목이 잡혀 잘나가던 옛 시절의 높은 지위와 소득을 마냥 그리워한다. 당연히 여생은 인생 내리막 길이기에 체면 유지에 민감하고 남에게 쉽게 섭섭함을 느낀다.

반면에 후자는 직장을 그만두는 순간 모든 걸 털어 버리고,제로 베이스에서 철저히 새로운 제2의 인생을 시작한다. 강의나 저술에 몰두하는 학구형이 있는가 하면 창업이나 귀농을 시도하는 도전형,아예 수필가나 서예가로 변신하는 예술가형 등 다양하다. 그들은 나이를 초월해 뭔가에 몰두할 수 있기에 적은 수입이라도 올린다.

사회심리학자들은 노후에 쌓아놓은 재산을 빼 쓰는 부자보다 다만 얼마라도 고정 수입이 있는 제2 인생형 인간이 정신적으로 더 안정을 누린다고 말한다.

우리는 당연히 제2의 인생을 개척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사오십대 잘나갈 때부터 미리 준비해야 하는데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이 '근시안적 소비'의 함정이다. 기러기 아빠같이 눈앞의 소비에 무리수를 두며 막상 자신의 노후 준비에 대해서는 '늙으면 자식이나 국가가 어떻게 해주겠지…'하며 막연한 낙관을 하는 것이다. 참으로 위험한 생각이다.

지금은 노인 1명을 7명의 경제활동 인구가 부양하지만 2030년에 가면 겨우 2.8명이 부양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젊은 세대가 도저히 지금처럼 노인을 모실 수 없을 뿐더러,국가재정도 바닥이 나 국민연금이나 의료보험 제도도 흔들린다. 따라서 잘못하면 '근시안적 소비=노년 파산'으로 이어지기 쉽다.

나아가 일본의 퇴직 샐러리맨 같은 젖은 낙엽(!) 신세를 면하려면 '아줌마형 인맥'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 남성 샐러리맨들은 직장 위주로 인맥을 형성하기에 정신없이 바쁘게 지내다가도 퇴직하면 모든 인맥이 일시에 사라진다. 결국 믿을 건 가족뿐인데 그간 별로 대화를 안해 봤으니 서먹할 뿐이다.

여기에 비해 아줌마들은 사람들하고 잘 사귀고 소통하며,이웃이나 친목회 등을 통해 다양한 인맥을 엮어 나이가 들수록 더 바빠진다. 일본 할아버지 신세가 되기 싫으면 지금부터라도 가족들과도 대화하고 취미,신앙 생활 등을 통해 많은 사람들과 폭넓게 사귀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남을 배려하고 돕는 것도 인생을 풍요롭게 하는 길이다. "받는 기쁨보다 베푸는 기쁨이 더 큽니다. " 암울했던 구한말 1만달러라는 거금을 기부해 오늘날 세브란스병원의 토대를 만든 L H 세브란스의 명언이다. 가슴에 뜨겁게 와 닿는 말이다. 적어도 우리가 어려웠을 때 남에게 받은 만큼을 도와주는 마음으로 국내는 물론 해외에 나눔과 봉사의 미덕을 실천해보자.

지금부터라도 잘 준비하고 마음을 바꾸면 제2의 인생이 오히려 제1의 인생보다 알차고 즐거울 수 있다. 개인적으론 나이 들면 유치원에서 꼬마들과 놀며 가르치고 싶다. 그런데 어린애들이 할아버지 선생님을 좋아할지 모르겠다.

안세영 < 서강대 경제학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