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1000년 동안 중원을 통치하던 주나라가 몰락하면서 우후죽순 격으로 제후국들이 등장하게 된 것은 유명무실해진 천자의 권력 탓이었다. 제후국을 통솔할 수 있는 원천적인 힘이 무너지면서 정치적 분열과 도덕적 위기가 생기고 그 사이를 의식주 문제가 파고들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춘추전국시대다.

그나마 천자의 권위가 실낱같았던 춘추시대에는 제후국 사이에 도덕률이 존재했으나 영토문제 등으로 서로 무력충돌을 일삼으면서 전국시대로 접어들었다. 이 과정에서 50여개의 제후국은 7웅으로 정리됐다. 강자는 늘 약자 위에 군림하고 약자는 강자의 희생양이 되지 않기 위해 화해를 원했지만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였다. 힘을 합쳐 강자에게 대항하느냐 아니면 강자의 그늘에 기대어 살아가느냐 하는 식의 논의가 재생산됐으니 전자가 합종이고 후자가 연횡이며 전자의 대표가 바로 소진(蘇秦)이다.

《사기 소진열전》에 의하면 소진은 동주(東周) 낙양(洛陽) 사람으로 일찍이 스승을 찾아 동쪽 제나라로 갔다가 귀곡 선생(鬼谷先生)에게 배웠다. 귀곡 선생은 전국시대에 활동한 종횡가 중 한 명으로 소진의 친구 장의의 스승으로도 알려져 있다. 소진은 배운 것을 써보기 위해 동주를 떠나 여러 해 동안 유세하러 다녔지만,많은 어려움을 겪고 집으로 돌아왔다. 비웃음을 뒤로한 채 문을 걸어 잠그고 방에 틀어박혀 있을 때 그의 뇌리에 박힌 책이 바로 스승 귀곡자에게서 물려받은 병가의 책 《음부(陰符)》였다. 이 책에 파묻힌 채 1년쯤 보낸 그는 상대방의 심리를 알아내 설득하는 방법을 터득하고 곧바로 찾아간 곳은 서쪽 진(秦)나라였다. 강력한 진나라를 위해 그가 내세운 전략은 역설적이게도 연횡책이었다. 그러나 당시 군주인 혜왕은 조나라와의 전쟁을 치르느라 지친 상태였기에 소진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자신의 판단을 믿은 그는 다시 조나라로 발길을 돌려 수도 한단까지 머나먼 길을 갔으나 당시 조나라 숙후(肅侯)는 소진을 만나주지도 않았다. 그러나 낙심하지 않고 다시 요서 지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연나라로 들어갔다. 연나라 문후(文候)도 처음엔 만나주지 않았으나 1년 동안 그곳에 머물며 기다린 소진의 정성에 마음을 움직여 소진에게 유세할 기회를 주었다. 문후 앞에 나섰을 때 그는 연나라 백성들의 창고에 어떤 물건이 쌓여 있는지도 소상하게 알고 있었기에 소진은 이렇게 말했다.

"연나라 땅은 사방 2000여리가 되고,무장한 병력이 수십만명이며,수레 600대에 말 6000필이 있고,쌓아 놓은 식량은 몇 년을 견딜 수 있는 양입니다. 남쪽에는 갈석(碣石)이나 안문(雁門 )같은 물자가 풍부한 곳이 있고,북쪽에는 대추와 밤에서 얻는 이익이 있어 백성은 밭을 갈지 않아도 넉넉하게 살 수 있습니다. "(사기 소진열전)

문후의 마음을 얻은 소진은 연나라를 거점으로 해 수레,금과 비단을 갖고 조나라 숙후에게 다시 와 치밀한 논리로 유세해 숙후의 마음을 움직이게 되고 조나라와의 합종을 맺게 해 진나라에 대항하자는 합종안을 관철시킨다. 진나라를 제외한 나머지 6개국의 이해관계를 틀어쥔 소진은 절대 약소국인 한(韓)나라를 설득할 때는 한나라의 뛰어난 무기들의 우수성을 거론하면서 소꼬리보다는 닭의 부리가 되라는 계구우후(鷄口牛後)논리로 왕을 설득시켰으며 인접한 약소국 위나라에는 진나라 속국이 되는 길이 치욕스럽지 않느냐고 하면서 다그쳐 동의를 이끌어냈다.

결국 소진의 노력에 의해 초나라와 제나라를 포함,여섯 나라는 합종책을 받아들여 공동으로 진나라에 대항하면서 15년 동안 진나라 군대를 함곡관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했으니 역사를 뒤바꾸는 자는 의외로 단 한 명의 인재가 아닌가?

김원중 < 건양대 중국언어문화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