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이 1970년대 고엽제를 우리 땅에 파묻었다는 사실이 드러나고,뒤이어 부천에 있던 미군기지에서도 화학 폐기물을 매립했다는 증언이 잇따르면서 상황이 심각해지고 있다. 미군이 주둔지의 환경을 오염시킨 것은 우리나라뿐이 아니다. 1992년 필리핀의 수비크 클락 기지에서 미군이 철수한 뒤,미군이 남긴 환경문제로 필리핀은 오랫동안 고통을 받아야 했다. 일본의 경우도 미군이 폴리염화비페닐(PCB)이라는 유해 물질 135t 이상을 무단 폐기해 상당기간 일본 여론이 들끓은 적이 있다. 결국 이 문제는 2004년 미군이 PCB 폐기물을 자국으로 수송함으로써 매듭지어졌지만,5년 넘는 기간 동안 문제 수습에 난항을 겪었다.

이런 예로 볼 때 우리에게 발생한 고엽제 폐기물을 비롯한 화학 폐기물 문제 역시 그 해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꾸준하고 침착한 접근이 필요하다. 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위한 첫 번째 단계는,고엽제와 화학폐기물을 매립했다는 사실에 대한 미국의 인정 여부다. 만일 미군이 이 부분에 대해 인정하지 않거나 수습을 거부하면 문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지기 때문이다. 다행히 미군은 자신들의 매몰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물론 여기에는 우리나라의 국력이 신장했고 시민사회가 그만큼 성숙했기 때문이라는 이유도 있겠지만.이 사실이 당시 근무했던 미군들을 통해서 알려졌기 때문이라는 것도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 다음 단계는 우리가 미국 측에 요구해야 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첫째는 재발방지 대책에 대한 요구다. 이를 위해 앞으로 미군이 오염물질을 규정대로 처리한다는 점을 명확히 하고 또 문서화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지키지 않았을 경우 책임을 물을 수 있도록 하는 제도적 장치도 필요한데,이를 위해서는 독일의 예가 참고가 될 것이다.

우리의 경우 주한미군지위협정(SOFA)에 'KISE(건강에 대한 급박하고 실질적인 위험)' 기준으로 환경오염 치유를 하도록 규정돼 있다. 따라서 이번 일과 같은 상황이 발생하면 문제 해결에 애로를 겪을 수밖에 없다. 이에 비해 독일의 경우는 보충협정을 두어 그 책임 소재와 문제 처리 비용을 미국 측이 부담하게 돼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일을 계기로 우리도 독일과 같은 보충 협정을 맺을 필요가 있다. 또 하나의 논란거리는 미국 측에 의한 배상 문제다.

하지만 이 문제는 여러 어려움이 따를 수 있다. 일단 당시 미군기지 근처에 살다가 암 등으로 사망한 경우 심증은 가지만 직접적인 연관관계 규명이 어렵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또 고엽제 매립이 발생한 시점이 이미 30여년 전이어서,이런 행위를 통제할 수 있는 한 · 미 간 협정이 미비하던 시절이고 따라서 소급 적용이 불가능하다는 사실도 배상 문제를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앞으로의 재발방지와 현재의 상태가 어느 정도 심각한지에 대한 객관적 평가,그리고 그에 입각한 대책 수립에 초점이 모아지는 것이 현실적이라는 생각이다. 이를 위해서는 침착한 접근이 필요하다. 지금 일단 미국과 우리 정부 합동 조사단이 꾸려져 있기 때문에 차분하고 침착하게 이들 합조단의 조사 결과를 지켜보는 냉정함이 필요하다. 자칫 이 문제를 지나치게 정치적으로 비화시켰을 때는 문제의 본질에 접근하지도 못한 채 이념적 갈등으로 전개될 수 있고,그렇게 되면 문제 해결이 더욱 요원해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만일 조사결과가 미흡하다면 그때 가서 절차적으로 따지면 될 것이다. 지금부터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접근하면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될 수 없다는 말이다. 민주주의는 절차적 정당성으로부터 결과의 정당성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항상 명심해야 한다.

신율 < 명지대 정치학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