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통에 살아가는 억척이 삶이 참으로 기구하다 싶다가도 아 요새 사람들 생각허면 억척스럽지 않고는 살아갈 엄두가 안나는,여기가 바로 전쟁터가 아니더냐."

'예솔이'로 유명한 소리꾼 이자람(33 · 사진)이 '억척가'로 돌아왔다. 2007년 브레히트의 '사천의 선인'을 21세기 한국 사천에 사는 뚱뚱한 처녀 순덕의 이야기로 탈바꿈해 호평을 받은 지 5년 만이다.

이자람의 '억척가'는 판소리 다섯 마당 중 하나인 '적벽가'의 중국 삼국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브레히트의 원작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이 유럽의 30년 종교전쟁을 배경으로 한 것과 대비된다. 이자람은 대본,작창,연기를 맡는 동시에 억척어멈,두 아들,딸,취사병,뺑어멈,천의도사,병사,해설자 등 1인 15역의 캐릭터를 혼자 소화한다.

연출가 남인우 씨는 "이자람은 때로 '이!잘난'이라고 불릴 정도로 판소리 어법을 본능적으로 구사할 줄 아는 소리꾼이면서 동시대 사람들에 어떤 말을 건네고 싶은가를 치열하게 고민하는 작가"라고 평가했다.

'억척가'의 내용은 이렇다. 전남 시골 마을의 김순종이란 여인이 사소한 오해로 소박을 맞은 후 중국 한나라에 도착한다. 아비가 다른 세 명의 자식을 둔 김순종은 그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전쟁 상인이 된다. 착하고 순박했던 이 여인은 전쟁의 소용돌이를 겪으며 거짓 상술로 가득찬 장사꾼이자 자식의 죽음 앞에서도 모른척하는 비정한 어미로 변해간다.

이자람은 작가로서 언어유희와 세태 풍자에 민감한 필치를 유감없이 발휘한다. 21세기에 우리가 사용하는 물건 이름이 불쑥 등장하기도 하고,급할 땐 영어가 등장하기도 한다.

"억척어멈의 달구지에는 화살촉,장화,투구,손전등,술병,논어책,이어폰,아이폰까지 있어야 할 건 다 있고 없을 건 없구나"하는가 하면 "지긋지긋한 내 팔자야 이놈의 이름을 바꿔보자….글로벌 시대에 맞춰 영어 이름이 좋겠구나….수잔 제인 캘리 소피 아니야,안되겠다,내 더 이상 아이는 안 낳을테니 안 낳아 안 나 안 나 안나 내 이름은 오늘부터 김안나로다"라며 판소리만이 표현할 수 있는 위트를 발휘한다.

브레히트의 '억척어멈'과 이자람의 '억척어멈'의 가장 큰 차이는 비극을 다루는 태도다. 세 명의 자식을 잃은 브레히트의 억척어멈이 비극 그 자체로 끝을 맺는다면 이자람의 억척어멈은 전쟁 통에서 죽음을 빌어먹고 사는 삶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서사,비극을 딛고 일어서는 희망을 준다. 음악도 파격적이다. 인디밴드 한음파의 베이시스트 장혁조와 타악연주자 김홍식,이향하가 '사천가' 이후 다시 뭉쳤다. 북,장구,꽹과리는 물론 젬베,준준 등 아프리카 타악기가 더해지고 기타와 베이스까지 합류한다. 이자람은 지난해 폴란드 콘탁국제연극제에서 '최고 여배우상'을 받았다. 14~19일 서울 역삼동 LG아트센터.전석 4만원.(02)2005-0114

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