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1월 광저우아시안게임 때 일이다. TV를 통해 흥분한 대만 사람들이 한국산 라면을 짓밟고 욕을 하면서 태극기를 모독하는 장면을 봤다. 그들이 왜 그렇게 흥분하는지 선뜻 이해할 수 없었다. 필자가 자랄 때 이웃에 화교들이 많이 살았다. '왕서방'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던 그들이 운영하던 음식점에서 맛본 구수한 짬뽕 국물과 자장면 곱빼기는 추억이 깃든 마음의 고향이기도 하다. 구멍 뚫린 러닝셔츠를 입은 중국집 주인의 입담으로 풀어내는 쿵후 자랑과 쌓인 밀가루 포대 앞에서 밥과 양파만 먹으며 착실히 돈을 모으던 그들의 모습이 아련하게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이젠 그들 대부분이 대만으로 돌아갔다. 한국에 뿌리내리기가 어려워서다.

최근 대만에 갔을 때다. 그곳에서 종합상사 지사장으로 있는 친구가 이런 말을 했다. "지금 대만 사람들은 한국인이나 한국 정부를 극도로 싫어해.한국인으로서 정말 부끄럽고 자존심이 상하는 거지." 친구가 답답한 표정으로 얼굴을 찌푸리며 말을 이어갔다. "한국 기업들은 말이지,대기업까지도 갑자기 국제 원자재 값이 올라 손해를 볼 것 같으면 계약을 이행하지 않는 거야.얼마나 생각이 짧고 약은 행동이야.일본 기업은 손해가 예상돼도 계약 내용대로 성실하게 이행해.그러면 대만의 기업은 다음 거래에서 그 손실을 회복할 수 있도록 배려를 해주고 말이지."

급성장 과정에서 우리는 신의를 잃어버린 것 같았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근성이 어느새 몸에 밴 건지도 모른다. 그 친구의 독설은 정부로 향했다. "정부가 하는 행동도 역시 가벼워.중국과 국교 정상화를 할 때 말이야.중국 측은 대만과의 외교관계를 단절할 것을 우리 정부에 단호히 요구했었지.우리 정부로서는 국익상 절실하기는 했지만 과정이 비난받을 만했지.대만 정부가 이 사실을 눈치 채고 우리 정부에 공식 확인에 들어갔지만 중국과의 국교 정상화 발표 하루 전까지도 오리발을 내민 거야."

대만은 오랜 세월 외교관계를 맺어 온 우방이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손바닥 뒤집듯 돌아서버린 것이다. 우리나라는 가난을 딛고 이제 10위권의 경제대국으로 우뚝 섰다. 손가락질 받는 졸부로 따돌림당하지 않으려면 이제 국가도 격을 높여야 한다. 어려운 이웃 나라가 있으면 말 없이 도와주고 신세진 게 있으면 조용히 갚아야 한다. 그런데 우리의 태도는 검불보다도 가볍다. 북한에 조금 도움을 주고는 북 치고 꽹과리 치면서 선전해 그들의 자존심을 상하게 한다. 급하면 뒷돈을 주는 즉석장난을 치다가 망신을 당하기도 했다. 거저 얻어먹던 근성이 아직도 남아 있는 걸까. 정세가 흉흉해지면 미국의 항공모함이 동해로 들어오길 바란다. 돈이 있으면서도 안보문제를 공짜로 해결하려는 사대주의 속성 같기도 하다. '한국은 믿을만 해,한국 사람들은 확실히 약속을 지켜,그 사람들과 거래를 했더니 유익하던데'라는 이웃의 칭찬을 듣는 날이 하루 빨리 왔으면 좋겠다.

신영무 < 대한변호사협회장 ymshin@shinkim.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