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교천 지류인 곡교천을 흐르는 물줄기를 바라보며 은행나무 가로수를 따라 이순신(1545~1598) 장군을 만나러 간다. 염치읍 백암리 방화산 기슭,1706년(숙종 32) 건립 이래 충무공 이순신을 모셔온 현충사에 닿는다.

마가목 흰꽃들이 내뿜는 향내를 맡으며 정려를 지나고 연못을 지나 정유재란 때 아산지역을 침범한 왜적과 싸우다 전사한 장군의 셋째 아들 이면 공 묘소에 오른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게 이치가 마땅하거늘 네가 죽고 내가 사니 이렇게 어긋난 일이 어디 있단 말이냐"라고 통곡했을 만큼 사랑했던 아들이다. 옛집 앞,이순신 장군이 활쏘기 연습을 하던 활터에 이른다. 부하들과 활쏘기 시합도 마다하지 않았던 장군의 모습을 떠올린다. 어렸을 적 서울 건천동(현재의 인현동)에서 이사 와 무과 급제(1576) 전까지 살았던 'ㅁ'자형 옛집과 우물을 들여다본 후 본전으로 오른다. 월전 장우성 화백이 류성룡의 《징비록》에 묘사된 장군의 모습을 참조해 그렸다는 '표준영정' 속 이충무공은 곱상한 얼굴이나 수척해 보인다. "풍만하고 후덕지 못한 인상에 입술이 말려 올라간 듯 뒤집혀 복장(福將)의 모습은 아니었다"는 무과 합격 동기생 고상안의 말이 훨씬 사실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왜일까. 충무공이순신기념관에서 《난중일기》 및 서간첩,임진장초(국보 제76호),길이 197.5㎝의 장검 등을 돌아본 후 음봉면 삼거리 어라산 자락 이충무공묘로 향한다.

◆너무나 인간적이었던 장군의 삶

들머리에 서 있는 신도비를 지나 묘소 아래 정조 18년(1794)에 세운 어제비를 들여다본다. '우리 열조의 중흥의 공로에 기틀을 만든 것은 오직 충무공 한 사람의 힘에 힘입은 것(烈祖中興之功者維忠武一人之力)'이라는 구절에 꽂힌다.

양옆으로 소나무들이 열병하듯 늘어선 길을 따라 묘소에 오른다. 동자상 · 망주석 · 석상 · 문인석 · 광명등 · 묘비석이 지키고 섰다. 노량해전(1598)에서 전사한 장군은 임시로 고금도에 안치됐다가 이듬해 2월에야 아산 금성산에 안장됐다. 15년이 지난 광해 6년(1614)에 다시 묘소를 옮긴 것은 1604년(선조 37년) 우의정에서 좌의정으로 품계를 올려 추증한 것을 계기로 후손들이 조정에 '첫 장례가 전란 직후라서 제대로 예우를 갖추지 않은 상태에서 치러졌다'며 이장을 상소했기 때문이다.

소나무 그늘에 앉아 잠시 《난중일기》를 통해 본 장군의 모습을 생각한다. 장군은 때때로 부하들과 바둑 · 장기를 두고,못 마시는 술을 마시고 부대끼고,구토 · 설사 · 오한에 몸을 적시는 등 병마에 시달리기도 하고,어머니와 아들의 죽음 앞에서 한없이 애통해하기도 하는 지극히 인간적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나 그는 적과 맞설 땐 한 치의 틈을 보이지 않는 강골이었다. 내가 사랑하는 건 박제된 영웅이 아닌 한없이 인간적인 이순신이다.

◆영인산 자락에 꽃피었던 불국토 흔적

아산온천지구를 지나 옛 아산현의 관아가 있던 영인면 아산리에 이른다. 영인초등학교 앞 아산현 관아 정문이었던 여민루를 바라본다. 팔작지붕 추녀의 귀솟음이 솟구쳐 금방이라도 날아갈 듯한 비상감을 보여준다. 2층 기둥 간살이에 당초각무늬를 장식한 낙양각도 아름답다.

한말의 풍운아 김옥균(1851~1894)의 묘소를 찾아 마을 뒷동산을 오른다. 갑신정변(1884)을 일으켰다가 실패한 후 일본으로 망명했으나 상해에서 자객 홍종우에게 암살당한 김옥균.수구파에 의해 양화진으로 실려 와 시체마저 능지처참당한 그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무덤가에 피어난 노란 애기똥풀들이 위로하고 있다.

기품있게 늙은 소나무가 대성전 뜰을 지키는 아산향교를 지나 영인산(363m) 자락을 향해 올라간다. 흐드러지게 핀 찔레꽃과에 한눈을 팔다보니 세월이 곰삭은 절 관음사에 닿는다. 허름한 대웅전 앞에 선 고려시대 삼층석탑의 지붕돌 귀퉁이에 달린 풍탁(풍경) 2개가 앙증맞다. 석탑이 한 마리 소라면 풍경은 턱밑으로 늘여 단 워낭이다. 바람아,불어라.어서 저 워낭을 세차게 흔들어다오.

높이 320㎝의 카약같이 생긴 납작한 화강암에 새긴 둥글고 풍만한 얼굴의 석조여래불상을 들여다보고 나서 다시 향교로 내려와 이번엔 오른쪽 등산로를 탄다. 이내 석불과 오층석탑이 짝하여 살아가는 옛 사지에 닿는다. 장방형 얼굴에 머리 관을 쓴 영인석불이 얼굴 가득 미소를 띤 채 나그네를 맞는다. 날씬하게 생긴 오층석탑이 부질없이 영인산 봉우리와 키를 견주고 섰다.

버드나무 우거진 영인저수지를 지나 신현리 마을 뒷산 기슭 미륵불을 찾아간다. 미륵정토에 대한 기다림이 너무 길어서 그만 조바심이 난 것일까. 여성스럽게 생긴 미륵이 오른손으로 목걸이를 가볍게 쥐고 있다.

◆천주교 신앙의 태자리 공세리성당

다목적 테마파크인 피나클랜드를 지나 공세곶창이 있었던 인주면 공세리에 닿는다. 조선시대 청주 옥천 등 39개 고을에서 조세로 거둔 쌀을 서울로 운송하기 전에 보관하던 창고가 있던 곳이다. 창고 터 석축 아래엔 '삼도해운판관비' 6기와 선정비 3기가 서 있다. 공세곶창 관리들의 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라는데 '레알' 밥맛이다.

병인박해(1866) 때 아산 지역에서 순교한 박의서 등 32인의 순교자 유해를 모신 공세리 성당으로 간다. 늙은 팽나무들이 1922년에 지은 고딕양식의 붉은 벽돌 성당을 에워싸고 있다. 성당 박물관에는 1946년부터 사용했던 본당 종과 드비즈 신부의 유품,서한집 등이 진열돼 있다.

1895년에 부임한 드비즈 신부는 이명래(요한)에게 고약을 만드는 비법을 전수한 분이기도 하다. 내가 어렸을 적엔 불량한 위생 상태 때문에 몸에 종기를 달고 살았다. 그러나 어떤 악성 종기도 화롯불에 녹인 이명래 고약을 바르면 고름이 쑥 빨려 구멍이 뻥 뚫리곤 했다. 이명래 고약은 '종기 종결자'였다.

아산과 평택을 잇는 아산만 방조제로 향한다. 2.6㎞의 방조제 바깥으로 펼쳐진 갯벌이 황량하다. 갯벌을 기어가는 커다란 갯골을 바라보며 문득 고갈이라는 단어를 떠올린다. 아마도 내가 사랑했던 모든 것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버릴 때마다 겪어야 했던 젊은 날의 트라우마가 저러했을 것이다.

청 · 일전쟁의 무대였던 아산호 백석포에서는 강태공들이 배스를 낚고 있다. 이를테면 강태공들도 '외세'와의 전쟁을 치르는 중인가. 1978년에 문을 연 아산시 권곡동 온양민속박물관으로 향한다. 문화재로 지정된 거북흉배나 용문촛대보다 제2전시실의 통나무 속을 파내서 만든 남해안의 전통 어선 통구민,주꾸미 잡는 소라방 등 어구가 더욱 흥미롭다.

야외전시장을 거닐며 너와집,고인돌,무수한 문인석 · 무인석들을 만난다. 누가 전통을 낡거나 고리타분한 것이라고 하는가. 모든 첨단 혹은 미래는 전통이라는 늙었지만 시들지 않는 자궁에서 태어나는 것을….'전통은 아무리 더러운 전통이라도 좋다'(시 '거대한 뿌리')는 김수영의 시구를 생각하며 잠시 머물렀던 옛날 밖으로 슬슬 걸어나온다.

안병기 여행작가 smreoquf@hanmail.net

온천욕 즐기고 출출한 속엔 푸짐한 고기 딱이네!

맛집

아산시 음봉면 신수리 292-1 낙원가든(041-541-6866)은 아산 스파비스 입구에 있는 고깃집이다. 갈비,등심,불고기 등 다양한 메뉴가 있지만 푸짐한 고기와 시원한 국물 맛으로 특허까지 받은 앉은뱅이갈비탕이 인기 메뉴다. 스파비스 바로 앞에 있어 온천욕을 마친 출출한 관광객이 찾기 좋다. 앉은뱅이갈비탕 7000원,버섯생불고기 1만원.



여행정보

음봉면 신수리의 아산 스파비스는 국내 최초로 온천수를 이용한 수치료 바데풀을 도입한 가족 중심 테마온천이다. 전문의로부터 체질 진단을 받은 후 체질에 맞는 입욕 프로그램을 추천받을 수 있으며 한방 입욕제,아로마 해독치료 등의 서비스도 받을 수 있다. 계절에 따라 즐길 수 있는 포도탕 약초탕 레몬탕 등 23개의 테마탕과 노천탕 외에도 눈썰매장,야외공연장,피크닉장,배드민턴장,미니축구장 등의 옥외 부대시설을 갖춰 일상에서 쌓인 피로를 한꺼번에 날려 보내기 좋은 곳이다. 이용요금은 스파+온천 3만3000원(주중)~4만원(주말),온천 8000원.(041-539-2000)

공세리성당을 나와 온양온천 방향으로 가다 보면 영인면 월선리 물과 빛,바람을 테마로 한 다목적 테마파크 피나클랜드가 나온다. 거제 외도처럼 개인이 세운 이곳은 아산만방조제 공사 때 깎아내려 보기 흉측했던 석산을 아기자기한 복합문화공간으로 탈바꿈시켰다.